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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가 Aug 13. 2024

눈송이

무뢰한



2

밥은

아픈 덴 없지

돈 걱정하지 말고

아들 하고 싶은 거 해

너무 무리하진 말고

엄마가 많이 미안해

전화를 걸면 항상 엄마가 해주던 말들

이젠 들을 수 없으니 내가 나에게 해야 해

이제부터 나는 나에게 엄마가 되어야만 해





병력


엄마의 병력은 순서대로 위암, 파킨슨, 담낭암.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위암을 이겨냈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파킨슨병에 줄곧 시달려왔으며 내가 겨우 사회구성원이 된 뒤로 담낭암 4기 판정을 받았다. 끈덕지게 병마와 싸우는 다른 환자들과 달리 엄마는 마치 병을 달래고 챙기는 보호자처럼 스무스하게 생을 이어갔다. 스무스하게. 그렇게나 엄마의 병력은 스무스했다.

이 모든 병력이 생기기 전 엄마는 야쿠르트 아줌마였다. 야쿠르트 아줌마. 야쿠르트 주세요. 야쿠르트 없으면. 요쿠르트 주세요. 제목도 없는 이 노랫말은 나에게 자장가였고 엄마가 없는 깊은 밤에는 나를 지켜주는 응원가였다. 왜 이리 어린 시절부터 나는 혼자였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엄마도 아빠도 가난과 싸워서 그리됐나 보다. 가난도 하나의 병이라면 엄마의 병력은 순서대로 가난, 위암, 파킨슨, 담낭암이겠다. 모두가 돈이 약인 병들. 집에 약봉지가 그리 많은데 돈은 없으니 우린 계속 가난했다. 가난해서 함께 모여 밥을 먹는 식구가 될 수 없었고, 가난해서 집을 꾸리고 사는 가정도 이루지도 못했다. 그래서 엄마는 스쿠터를 타고 이른 아침에도 깊은 밤에도 야쿠르트 배달을 다녔다. 엄마가 늦네. 그렇게 혼자 되뇌고 되뇌다 보면 가끔 취한 아빠가 집에 들어왔고 가끔 엄마가 순대를 사들고 집에 들어왔다. 나는 그렇게 가끔씩 아빠의 취기를 머금고 잠이 들거나 엄마가 사 온 순대를 먹다가 잠이 들었다. 깊은 밤 입안 가득 순대를 오물거리고 있으면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를 지켜봤다. 그때 엄마는 나를 지켜봤다기보다 지켜주었던 것 같다. 유일하게 병마와 싸우지 않던 그 시절에 엄마는 온전히 나만 달래고 챙기는 위대한 보호자였다. 깊은 밤보다 깊던 엄마의 품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품은 병에게 내어주지 않은 유일한 엄마품이었으니까.




눈꽃카페


엄마가 약을 입에 달고 살지 않았던 시절이 아주 짧게 있었는데 그때 엄마는 술을 달고 살았다. 그건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엄마가 다니던 술집은 눈꽃카페. 그때 엄마는 눈송이 같아서 눈꽃카페였을까. 맑은 눈송이. 맑은 술을 마시는 맑은 눈송이. 그래서 엄마는 인기가 많았나 보다고. 나는 엄마 주변을 둘러싼 아저씨들이 밉지 않았다. 엄마의 소주 한 잔을 호기롭게 사주던 그 아저씨들은 엄마를 닮은 나 역시도 예뻐해 주었으니까. 오히려 기뻤다. 뭐든 예쁜 걸 좋아하는 우리 엄마를 예뻐해 주고 엄마가 좋아하는 나도 예뻐해 주니까 기뻤다. 그래서 나는 학교가 끝나면 눈꽃카페에 자주 갔다. 실상은 생활비 같은 용돈을 받으러 간 거였지만 그래도 난 붉은 조명 아래 술을 마시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내가 예쁜 걸 좋아하게 된 건 아무래도 그때 엄마의 모습 때문이 크겠다. 엄마로서의 시간보다 마담으로서의 시간이 길었던 그때의 엄마는 여자였다. 엄마를 비추는 붉은 동백꽃 무늬의 조명보다 우아하고 예쁜 여자.

눈꽃카페는 엄마로 인해 예뻤지만 엄마로 인해 소란스럽기도 했다. 엄마의 술 버릇은 전화였다. 술에 취한 새벽에 엄마는 나에게 그렇게 전화를 해댔다. 술을 삼킨 엄마는 자주 슬퍼했고 눈물까지 삼키고 나면 그늘이 드리웠다. 붉은 조명 아래 엄마는 검은 강에 빠진 사람처럼 깜깜하고 적막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를 구하러 갔다.

영화 [무뢰한]에 보면 배우 전도연이 연기한 마담에게서 엄마가 비친다. 혜경(전도연)은 술집 마담이다. 비운의 직업이 몸에 밴 그녀는 불행하다기보다 적막하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서 식당 손님들에게 사탕과 라이터를 건넬 때도, 편한 복장으로 시장에서 찬거리를 사며 돌아다닐 때도 적막해 보인다. 불행 너머의 생을 이어가는 어떤 적막함. 그 적막함이 혜경을 둘러싸고 있다. 엄마도 그랬다. 생을 이어가기 위해 선택한 그 직업이 엄마에겐 무척 고단했을 테지. 엄마는 예뻤지만 수척했고 웃었지만 슬퍼했다. 그 슬픔에 허우적거릴 때면 엄만 나에게 전화를 했고 나는 엄마를 구하러 달려갔다. 엄마는 캄캄한 룸 한구석에 앉아 계속해서 얼음을 씹어삼키고 술을 마셨다. 와드득 얼음을 씹고 꼴깍 술을 삼키고 다시 와드득 얼음을 씹고 술을 삼키고. 난 그래서 배우 전도연이 놀랍다. 마치 엄마를 들여다보고 온 사람처럼 혜경은 얼음을 씹고 술을 마신다. 그 장면의 소리와 손짓 그리고 표정마저도 모두 엄마다. 엄마가 들어차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눈꽃카페에서 일하는 엄마를 보려고 이 영화를 튼다. 그리고 배우 전도연이 연기한 모든 배역들 중에서도 나는 혜경이 가장 예뻐 보인다. 영화에서 맑은 소주를 마시는 혜경은 맑은 눈송이 같다. 맑은 술을 마시는 맑은 눈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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