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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Apr 14. 2019

3만 원어치의 분노

초보의 서울 운전 도전기


휴직 후 제일 잘한 일을 꼽으라면 단연코 운전 연수를 들 수 있습니다. 5년 넘도록 지갑 구석에 고이 잠들어 있던 면허증을 10시간 만에 깨워 빛을 보게 만든 연수 강사님은 가히 신의 경지였습니다. 연수를 시작하던 날 지하주차장 경사로를 올라가며 “아악! 선생님, 이러시면 안 돼요~!!”를 외치던 저는, 마지막 날 자유로를 달려 마트 주차장 진입까지 성공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운전대를 잡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걸음이 느린 아이들을 끌고 가느라 팔이 떨어질 것 같던 아침은 이제 안녕이었습니다. 하원 후,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도 들르고, 병원도 방문 가능했습니다. 멀어서 혼자서는 갈 엄두도 못 내던 강연도, 시댁도 이제는 거리낌 없이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운전에 재미를 붙인 지 5개월쯤 되었을 때, 혜화에 있는 서울대병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둘째의 영유검진 결과에 이상소견이 보여, 정밀 검진을 위해 그 분야의 저명한 교수님을 찾아갔던 길이었습니다. 별일 아니겠거니 했던 기대와 달리 교수님은 몇 달 뒤 재검을 받자 하셨고, 저와 -오후 출근인-남편은 어두워진 얼굴로 헤어졌습니다.


뒤에 둘째를 태우고 안국을 거쳐, 광화문 앞 세종로 2차로에서 신호대기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3차로의 검은색 SUV 차창이 내려가더니 뜬금없는 쌍욕이 들려왔습니다.

“야, 이 썅X아, #;@₩/@,#&!”

갑자기 시간이 멈춘 듯 멍했습니다. 뭐지? 뭐가 잘못된 거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거지? 처음 겪는 상황에 차창도 내리지 못하고 그 아저씨만 끔뻑끔뻑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긴 신호가 끝나고 차를 출발하려는데, 이번에는 부와아앙 소리를 내며 제 앞을 가로질러 가버립니다. 사고가 날 뻔한 상황에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쿨한 척 넘겼습니다. 남편과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오늘 미친놈을 봤다, 정도로 잘근잘근 씹으며 넘겼습니다. 그러나 충격이 커서인지, 곱씹을수록 억울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왜 이유도 모르고 을 들어야 하지? 야밤에 분기탱천해 주차장으로 뛰쳐나와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꺼냈습니다.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자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욕설을 하기 전, 검은색 SUV는 사이드를 확인하지 않은 채 2차로에 끼어들다가 뒤늦게 제 차를 발견하곤 얼른 3차로로 되돌아갔던 겁니다. 이유를 알아도 억울했습니다. 들이대는 차를 피해 줬더니 쌍욕이라니!


특유의 집요함이 발동했습니다. 차 번호판을 확인하고, 무슨 법을 어겼는지 비슷한 사건을 구글링으로 찾아냈습니다. 두 가지 플랜이 나왔습니다.

1. 보복운전

2. 불안감 조성+무리한끼어들기


다음날 아침, 국민 신고 앱으로 신고를 개시했습니다. 우선은 벌금이 큰 보복운전. 일주일 후에 A서 교통과에서 온 답변은 실망스러웠습니다. 끼어들기에 해당하는 ‘제차신호조작 불이행 3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남편은 이 정도면 되지 않냐 물었지만 잠을 설친 며칠 밤은 그 정도로 보상할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불안감 조성을 신고했습니다. 퉁명스러웠던 A서와 달리 B서 생활 안전계 경장님은 친절했습니다. 그가 먼저 보복운전 이야기를 꺼냈지만 A서 이야기가 나오자 일사부재리 때문인지 말을 아끼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뒤 허무하게도 ‘불안감조성죄’ 또한 해당되지 않는다는 답변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법적용이 미묘한 상황 차이에서 달라질 수 있다며, 애매하지만 친절한 설명으로 결국 제 전투력을 무너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A서에 정보공개 신청을 하거나 국민신문고로 이의를 제기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분노는 딱 거기까지 였습니다. 딱 3만 원어치. 더 이상 유난 떨지 말자. 그 아저씨도 동네 서에 가서 벌금 내며 뜨끔한 게 있겠지. 애 엄마라 얕보고 그런 것이라는 확신에  타올랐던 분노는 그렇게 사그라들었습니다.  


무엇이 옳은 것일까요? 아버지 뻘 돼 보이던 그 도 분노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까요? 운전을 하며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깨달았습니다. 눈치 보며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하는, 암묵적인 룰 투성이의 도로. 교통안전교육 때 ‘도로는 생물처럼 유동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배경 ⓒ다음 웹툰, 나는 엄마다. 164화, 순둥이 드라이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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