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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Jun 23. 2019

언젠가는,

bloom.

만 51개월, 5살 진이는 최근 읽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약통에 붙은 자신의 이름과 동생의 이름, 그리고 신발장의 친구들 이름표를 줄줄이 읽기 시작했을 땐, 이 아이가 천재인 줄 알았습니다.-부모란 이렇게 콩깍지가 쉬이 씌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단어를 모양으로 외워 읽을 뿐, 아직 완벽히 한글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한 진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책을 들고 엄마에게 달려옵니다.

“엄마, 이거 어떻게 읽어?”

“이건 뭐라고 써 있는 거야?”

좀 이르지만 관심을 보일 때가 교육의 최적기라 생각했습니다. 주변 엄마들에게 물어물어, 큰맘 먹고 유명한-그리고 꽤 두꺼운- 한글 입문서를 들였습니다.


워낙 워크북-놀이 학습지-을 좋아하던 아이라 혼자 포장을 뜯고 설레는 얼굴로 문제집을 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첫 장부터 넘어가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우선, 운필력이 약해 쓰는 모습부터 어색했습니다. 불안정한 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뱀처럼 이리저리 도망갑니다. 쉬울 줄 알았던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 열 개의 기본 모음 외우기에서도 막혀 며칠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진이는 ‘어’를 따라 쓰라고 시키면 ‘오’를 쓰고, ‘아’를 쓰라고 시키면 ‘어’를 씁니다. 아이에게 글자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뒤집을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보였나 봅니다.  


어린 시절, 제게 한글을 가르치다 야밤에 뛰쳐나가 담배를 뻑뻑 피던 친정아버지의 뒷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몇 번 큰소리를 내다, 안 되겠다 싶어,

“진아 이제 그만하자. 잘 안되잖아. 조금 더 언니 된 후에 하자.”

단도직입적으로 아이에게 포기를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에 따르지 않습니다. 어제 공부한 지 두 페이지만에 엄마의 한숨에 질려, “나 그만할래. 그만하고 싶다~.”라고 칭얼대 놓곤, 오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문제집을 들고 와 또 하자고 조릅니다. 이 아이가 회복탄력성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기억력이 나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이든 다행일까요? 엄마는 포기한 게 잔뜩인데 말이죠.


글쓰기를 시작한 지 반년만에, ‘내글구려병’에 걸렸습니다. 작가들이 한 번씩 겪는다는 슬럼프, 나는 여태껏 무슨 대단한 글을 썼다고 이 유난인가. 그런 슬럼프도 유명한 작가나 돼야 극복할 법하지, 뭐하나 이룬 것 없이 벌써 돌부리에 넘어지니 포기하고픈 마음이 울컥 쏟아졌습니다. 이걸로 돈 벌 것도 아니고 취미생활인데, 적당히 하자, 안되면 접고. 마음속 검은 아이가 끊임없이 재잘 댑니다. 작가는 차고 넘치고, 그중 잘하는 사람도 빛을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나야 어떨지 뻔하잖아. 그러니 시간, 노력 낭비하지 말고 접자.


완벽주의의 가면을 쓴 허무와 게으름은 불쑥불쑥 튀어나와 ‘포기’를 외치라 제 옆구리를 찌릅니다. 흡사 숟가락 살인마처럼, 계속계속. 내가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들 때까지.

https://youtu.be/4VyrudPO_A4

이 사람 은근히 무서움


그러나 피겨계에 김연아 선수만 있다면, 문학계에 김영하 작가만 있다면, 과학계에 스티븐호킹 박사만 있다면 당장 그 일인자도 아무 의미 없지 않을까?-일인자라는 건 상대적인 단어니까- 설사 내가 그들의 들러리라도,-슬픈 건 사실이지만- 그것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인생의 의미는 현재에서 찾을 수 없다. 당신이 행한 것으로 죽기 전에 입증될 것이다’라고 얘기했죠. 글에 매달린 휴직 7개월, 왜 그렇게 매달렸는지, 왜 아직도 쓰고 있는지 당장은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조금 멀리 떨어져 보면, 그때는 알게 되겠지요. 그러니 지금은 노트북을 켜고 한 자, 한 자 마음을 담아 자판을 누를 뿐입니다.


일주일 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진이가 스케치북을 들고 엄마에게 달려옵니다.

“엄마, 엄마, 내가 ‘아이’ 썼어!”

스케치북에 빼곡히 적힌 한 단어, '아이'. 그다음 날은 '우유', 그다음 날은 '아기'. 이제 똑바로 일어선 글자 무리가 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웁니다.    




Background photo (c) by Markus Spisk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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