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과 눈물로 비벼 먹은 점심밥 이야기
190109_공대생의 심야 서재 Basic Class 일부
90년대 후반, 일산 지역의 여러 학교는 도시락에서 급식 방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맞았다. 우리 학교 한쪽 벽에도 급식수레 이동을 위한 엘리베이터 설치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라진 엄마표 도시락과 급식의 중간에서 배달 도시락이 성행을 하기 시작했다.
꽤 더운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4교시 체육 시간, 그 날따라 반아이들은 아무 이득도 없는 족구경기 승패에 열을 올렸다. 공을 주시하는 매서운 눈길은 점심 종소리도 집어삼켰다. 평상시 종소리를 칼같이 지키던 애들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할 열기를 내뿜었다.
연장전까지 갈 정도로 팽팽한 상태에서 마지막 타자가 나라는 사실이 큰 부담이 되었다. 운동이라면 젬병인데다, 시선이 나에게 쏟아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차례가 온 것이다. 최선을 다해 공을 찼지만, 역시나 깔끔한 아웃이었다. 상대 팀은 기쁨의 함성을, 우리 팀은 아쉬운 한숨으로 마무리한 채 경기가 끝났다. 그 후 바로 교실로 돌아와 땀에 전 체육복도 갈아입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늦은 점심을 먹었다.
지금도 소심이지만 사춘기 때의 나는 지구최강의 소심이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3층 교실로 걸어 올라와, 도시락을 챙기고, 아이들과 모여 점심을 먹는 긴 시간 동안 울적한 마음을 회복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과정 동안 더 의기소침해져서 교실 구석 쓰레기통과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나 때문에 진 거야. 애들이 힘들게 연장전까지 왔는데 나 때문에…나는 밥 먹을 가치도 없어…’
지금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자책을 거듭하고 있었다. 더위에 지친 아이들이 허겁지겁 밥 먹느라 조용해진 반 분위기도 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다 결국엔 눈물까지 보이고야 말았다.-고작 족구때문에 태어나 처음으로 눈물 젖은 밥을 경험하다니!- 같이 먹던 친구들은 훌쩍거림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왜 울어~괜찮아~”
여자 친구들끼리 서로 달랠 때 쓰는 흔한 멘트. 그러나 어설픈 위로는 눈물을 그치게 하기는커녕 수도꼭지 돌리듯 눈물콧물을 펑펑 쏟아내게 했다.-입에 밥 우겨넣고 엉엉 우는 모습이 참 가관이었으리라-
그 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K가 숟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누구 죽었냐? 뭐 그런 거 가지고 울어? 밥맛 떨어지게.”
평상시 늘 까칠한 K다운 말이었다. 그 소리가 땅 속 깊이 처박혀 있던 나를 현실로 쑥 끌어올렸다. 눈물이 쏙 들어가고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정말 별 것 아니었다. 기억이 잘못되어 설사 점수에 반영되었다 하더라도 실기 한번은 큰 점수가 분명 아니었고, 점수만 아니라면 단순한 오락이었을 뿐이였다. K의 까칠한 말이 오히려 자기비하의 늪에 빠진 나를 구해준 셈이었다.
그때 그 친구들은 서른이 넘었고 각자가 가정을 이룬 지금도 자주 만나는 편이다. 3년여의 시간 동안 노란 플라스틱 도시락통에 담긴 미지근한 점심밥을 함께 먹으며 지낸 친구들. 그동안 성적고민과 친구고민을 나누며 동고동락했던 친구들. 지금은 교실을 벗어나 각자의 분야로 흩어졌지만 만나기만 하면 언제나 20년 전처럼 수다를 떤다. 그것은 아마 즐거워도, 속상해도 한결같이 모여앉아 밥 먹으며 대화하던 학창시절의 시간이 우리를 끈끈하게 붙여놓았기 때문이리라.
물론 K와도 잘 지내고 있다. 강산이 두번 변할 동안 겪어온 K의 성격으로 짐작하건데, 그 때 한 말은 나름 최선의 위로였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 정도 실수는 겉으로 뻔뻔하게 넘기지만 아직 자기 전 이불을 뻥뻥 차고, K 역시 상사와 대거리를 할만큼 아직 까칠하지만 후배 경조사를 일일이 챙길 정도로 부드러워진 면모도 보이곤 한다. 여전하지만 조금씩 성장하고 변화하는 우리. 10년, 20년 후를 넘어 할머니가 되어서는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지 사뭇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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