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감정은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들이닥친다. 멀쩡히 일상생활을 하다, 쾅! 하고 들이받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당사자조차 그 감정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두리번거릴 뿐.
당시의 나도 그랬다.
“할아버지 돌아가셨어.”
폰 너머 아빠가 하는 말이 뉴스를 듣는 것처럼 무감각했다.
“그게... 새벽에 응급 처치하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
「연천군에 거주하는 77세 H 모 씨는 새벽에 구급차로 일산병원에 이송되었으나…」
“아빠도 정신없다. 병원으로 얼른 와.”
「모 씨의 장남 48세 모모 씨는 응급처치에 동의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주섬주섬 검은 옷을 입고 장례식장에 갔다. 다른 친척들이 먼저 빈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의 빈소 같았다. 남의 빈소처럼 앉아 근황을 나누다, 나눠주는 상복을 걸쳐 입고 장례 절차와 물품 계산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치른 장례식은 그저 어떤 의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분향소에서 숙부가 나를 나무랐다.
“할아버지가 널 제일 예뻐했는데 그래도 좀 울어야 하는 거 아냐?”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첫 손주. 경상도 분이셨으나 나는 할아버지에게 차별당한다는 느낌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키가 160cm가 넘어서도 “미야~! 쪼끄만 게 처녀 다 됐네!”하며 반겨주셨고, 사촌 중 유일하게 나만 대학 입학금을 지원받았다. 그 후, 불편한 거동 때문에 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걸 미안해하다 돌아가셨다.
복도에 가득한 화환, 몰려오는 손님, 부조금 계산, 장례식 후 물품 잔금 계산 등. 밤을 새워 피곤했으나 정신은 소름 끼치도록 또렷했다. 자신의 선택으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자책 때문인지 장남인 아빠는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를 대신해 장손녀인 나는 아빠의 몫까지 백 원 하나 놓치지 않고 계산했다. 염을 하고, 화장터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조용히 흘린 눈물 몇 방울이 전부였다. 통곡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나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장례가 끝나고, 문자를 돌리고, 회사를 복귀하고, 출장을 가,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평화로운 일상이 다시 굴러갔다.
그러다 49재가 다가왔다. 시간이 맞지 않은 나는 신랑과 따로 추모 공원에 갔다. 아빠는 이 층이라고 했는데 어디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한쪽 벽면에 빼곡히 많은 유골함이 입주해있었다. 뭐라고 물어보지. 돌아가신 분은 높임을 쓸까?
“저... 할아버지 존함이 x 유자 득자인데, 위치 좀 알 수 있을까요?”
이 층 삼 열 구석. 내 손바닥만 한 곳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할아버지. 생전에 좋아하셨던 담배와 믹스커피, 팩 소주가 곁을 지키고 있었다. 유골함을 만지고 싶어도 유리가 손을 가로막았다.할아버지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사진을 보면 카랑카랑한 대구 사투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대답을 할 곳이 없었다. 아, 이젠 진짜 만날 수 없구나. 그제야 할아버지의 부재가 현실이 되었다. 슬픔에 치이고 난 후, 사십구 일 후에야 비로소 아파 엉엉 울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남편을 돌봐주셨던 시외할머님이 지금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다. 병원에 다녀온 그는 덤덤한 얼굴로 외할머니의 상태를 이야기했다. 그의 사촌 중 누군가가외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엉엉 울었다는 말조차 무미건조하다. 그는 교통사고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 걸까.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치여야 하는 걸까. 나는 그저 앞으로 또 부딪히게 된다는 사실밖에 모르는 게 가끔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