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탄 관광버스가 검정 리무진의 뒤를 쫓았다. 깜빡깜빡, 리무진 뒤꽁무니의 비상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맨 앞좌석에서 그걸 쳐다보던 나는 깜빡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깜빡,
“쥐띠는 새끼를 잘 쳐.”
시외할머니의 한 마디에 나는 터지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결혼 후 이 년째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 나날이 얼굴이 어두워지던 즈음이었다. 매년 구정마다 손주들 토정비결을 봐주시던 시외할머님의 입을 통해 내 띠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들었다. 그 말이 무에 그리 웃겼는지, 난 오 분 동안 쉬지 않고 웃다 눈물까지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연년생 딸 둘을 출산하고 X고생을 했다.
깜빡,
“할머니 이거 어떡하죠…?”
분명 냉수 세탁을 눌렀는데 아이 스웨터가 인형 옷이 되어버렸다. 예쁜 스웨터가 아까워 실이나마 재활용할 생각으로 들고 갔으나 시외할머님은 화가 단단히 나셨다. 이걸 나보고 어쩌라고! 하고 홱 돌아앉으시곤, 다음번 방문 땐 오그라들지 않는 실로 아이 원피스를 또 뜨고 계셨다.
깜빡,
"이번 주에 포천 안 가?"
거동이 불편한 시외할머님을 요양병원에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다. 신랑과 시어머니는 될 수 있는 한 매주 주말에 방문하려 했다. 처음에는 집에 가고 싶다고 어린아이처럼 우시다, 손목이 결박되어 지내다, 나중에는 있지도 않은 우리 집 셋째 이야기를 하셨다 했다. 그리고 호흡기를 끼고, 코를 통해 음식물을 주입했다. 십 개월 동안의 이별 과정에 나는 아이를 핑계로 제외되었다. 내 기억의 모습과 현실의 괴리가 커져만 갈때 쯤, 난 갑자기 지난주 주말 포천에 가보고 싶었다.
깜빡,
“예, 엄마 내려갈게요!”
여느 날과 다름없던 저녁, 남편은 차를 몰고 시댁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너무 늦어 나와 아이들은 다음날 아침에 버스를 타야 했다. 잠들기 전, 어둠 속에서 아이들에게 털어놓았다.
“얘들아, 왕할머니 하늘나라 가셨대.”
“왕할머니 못 걸어! 하늘나라 못 가!”
“음... 그건...”
“할무니 날개 있어? 훨훨?”
“아... 그런가 보네.”
깜빡이는 불빛을 따라 시외할머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이제는 그 불빛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분이 마음에 심어둔 다른 불빛이 있음을 안다. 그녀의 딸 둘과 외손주 내외 일곱, 외증손주 여섯은 덕분에 추위를 견딜 수 있다. 그들의 시린 몸을 덮은 시외할머니의 스웨터처럼. 나는 기억을 알처럼 품고 잊지 않기 위해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