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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Nov 11. 2019

또라이의 변(辯)

알고 보니 내가...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그가 살던 지역 근처에 용한 사주카페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열심히 교회를 다녔으나 그만큼 미신도 애정 하던 시절이었죠. 뭐가 그리 급했는지 토요일 이른 시간에 찾아간 그곳은 카페보다 ‘다방’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려 보였습니다. 지하 1층, 우중충한 보라색 조명 아래 허름한 소파와 나무 칸막이가 배치되어 있던 곳. 누가 봐도 그곳은 당시 유행하던 ‘사주 카페’의 화사한 이미지와 꽤 거리가 멀었습니다.


약 오십 대가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해준 사주 풀이는 별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둘 다 고집이 세다, 사업하지 마라 등등. 그러나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건, 그중에 이상한 구절이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가씨는 눈치가 빠르고, 귀가 얇은데, 고집이 세네.”


언뜻 들을 당시엔 그냥 넘어갔지만 다시 곱씹을수록 이상한 게, ‘눈치가 빠르고 귀가 얇으면 고집이 없다는 뜻 아닌가? 셋이 어떻게 한 사람의 성격이 될 수 있지?’ 싶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회사생활을 하며 불현듯 그 말이 떠오르며 이해되는 때가 닥쳤습니다.


어딘들 안 그러겠냐만은, 특히 소기업은 또라이 천지입니다. 체계 없는 업무 지시와 그에 따른 비합리적인 책임 전가 등.-거기에 대기업에도 있는 꼰대 마인드와 직장 내 괴롭힘은 덤이죠- 가 속한 이 업체도 예외도 아닙니다. 그중 모두가 인정하는 제일가는 또라이는 바로 저입니다.

 

입사한 지 180일도 안되어 사직의사를 밝히니 관리 과장님은 이때가 기회라는 듯 제게 이것저것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정말 제 행동이 이해가 안 간다는, 이게 다 네가 자초한 상황이라는 말투 같네요. 그래서 오늘은 또라이 중 한 사람으로서 그 입장을 변호해볼까 합니다.


Q1. 왜 자꾸 점심시간에 빠지는 거야? 그러니까 업무 일정도 공유가 안되잖아?

아침에 깨지고 점심에 말짱히 얼굴 보고 점심 먹을 만큼 멘탈이 단단하지 못해서요. 이런저런 꼴도 보기 싫기도 하고요. 점심시간은 제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책을 읽든, 잠을 자든 제가 왜 간섭을 받아야 하나요? 그리고 업무 공유를 공적 통로를 안 쓰고-보통 단톡 방이나 밴드를 이용함- 알음알음 담배 타임에 공유하는 게 비정상 아닌가요? 왜 제 탓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Q2. 왜 지시를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거야?

제 일도 의미를 알 수 없으면 막히는 법인데, 지시받은 일이면 더욱 납득이 돼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면 사장님 컨펌을 제게 맡기지 마시던가요. 제 의견 하나 없이 지시받은 대로 만든 시안을 내밀고 왜 제가 깨져야 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표님 설득을 저에게 일임하셨으면 지시사항을 이해시키는 건 기본 아닌가요.


Q3. 왜 상사와 어울리려고 하지 않니?

저는 일하러 회사에 다닙니다. 저 분의 말은 대화라기보다 자기만족을 위한 발화일 뿐입니다. 업무 외 쉬는 시간에 감정 노동까지 해야 하나요. 제가 참을 수 있는 건 월급 주는 대표님이나, 그 외 정상적인 상사까지입니다. 저는 표정 연기에 소질이 없으니 피하는 방법 밖에요.



사실 가장 큰 잘못은 접니다. 잘 알고 있어요. 상사의 표정이 빠르게 변화하는 걸 알면서도 제 기준에 옳은 걸 주장했습니다.-결국엔 상사 뜻대로 진행 했지만- 결국엔 타협할 거면서도 한 번은 의견을 말하는 게 옳다고 믿었습니다. 고분고분한 부하직원 외엔 상상도 못 했던 상사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을 겁니다.


결국 불안한 회사 사정으로 인해 그만두지만 이런 글이라도 남겨야 반면교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회사생활에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없되, 단 하나 옳은 것은 상사의 기분이라는 진리. 이것이 ‘눈치 빠르고, 귀가 얇되, 고집 더럽게 센’ 직장인이 실패에서 얻은 교훈입니다.  



Photo (c) by Thomas Griesbec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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