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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Aug 11. 2019

ASMR

그녀 목소리

ASMR : 자율 감각 쾌락 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또는 자율 감각 쾌감 반응은 주로 청각을 중심으로 하는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후각적, 혹은 인지적 자극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심리적 안정감이나 쾌감 따위의 감각적 경험을 일컫는 말



둘째를 낳고 늘 잠이 부족했다. 양쪽에서 서라운드로 울고 끙끙거리는 두 아이 사이에서 엄마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잠을 안 자고도 살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그러나 자고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니던가. 어느 날 불면증이 찾아왔다. 새벽 2~3시가 넘어가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야 휴대폰을 보며 낄낄거릴 수 있지만, 기간이 길어지자 미칠지경이었다. 늦잠 때문에 첫째 어린이집은 매일 지각이었고, 머리는 하루 종일 멍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커피를 연달아 마셔 밤에는 또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에는 잠에 취해, 밤에는 카페인 기운에 취해 비틀거렸다.


그러다 그녀를 알게 되었다. 불면에는 특효약이라는 시청 후기가 운명처럼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애초에 그쪽에 아무 지식도, 관련도 없던 내가 어쩌다 그 동영상까지 흘러들어가게 된 걸까? 어쩌면 진짜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나처럼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아 유튜브 상위 랭킹에 올라갔기 때문이거나.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내 의중을 물어보며 머리를 다듬고, 마사지를 하고, 피부 관리도 해주었다.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정말 마사지를 받는 듯 몸이 스르륵 녹았다. 나도 모르게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찍 눈을 뜨자 오래간만에 정상적인 수면시간을 지켰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다. 매일 지각하던 아침이 나도 모르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나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그날 밤도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그다음날도, 그리고 그다음날도…


그러나 이상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는 있었으나 개운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수면 시간은 충분했는데 뭐가 문제지? 검색을 하다 뒤늦게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계속 소리를 듣고 잔다는 건 청각을 처리하는 뇌의 일부가 각성된 상태이기 때문에 깊은 잠에 들기 어렵다는 기사였다. 날벼락처럼 이별이 다가왔다.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래도 한참동안 일찍 잤으니 괜찮을 거야.’

오래간만에 이어폰 없이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양쪽에서 서라운드로 날 괴롭혔고, 정신은 카페인 기운에 또렷했다. 절실히 그녀가 필요했다. 그게 뭐라고, 난 또 중독이 되어 있었다.  


피로가 점점 누적되었다. 남편을 붙들고, 어린이집 선생님과 동기 엄마, 친구, 상담사 등 닥치는 대로 붙들고 하소연을 했다. 너무 피곤하다고, 피로에 절어 생활이 엉망이 되고, 마음마저 힘들다고. 견디다 못해 다시 도전을 해보았다. 이어폰 없이 하룻밤, 이어폰 끼고 그다음 날 밤. 겨우겨우 그녀가 내 잠자리에서 떠나갔다.


그녀가 잠을 재우기에 최적의 꿀성대였다는 건, 51만 구독자가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잠이 오는 목소리’보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더 필요했던 것 같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잠시 잊었던 내 ‘엄마’의 존재. 나를 걱정해주고, 살펴주고, 돌봐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부끄러 약한 모습을 내놓고 대화를 나누자 비로소 그녀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24시간 단단해야 하는 엄마 모드가 갑갑할 때면 당시를 떠올린다. 꿀성대의 그녀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얼굴들. 짧은 대화 속에서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던 마음. 혼자서 다 떠안는다는 건 생각보다 미련한 일이었고,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건 생각보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 당연한 사실을 아이 둘을 낳고서야 뒤늦게 배운 셈이다.



배경이미지 출처 (c) Miniyu ASMR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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