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e Aug 24. 2019

인스타에서 만난 그

소셜미디어에서 만난 친구라는 환상

이 년 전, 당시 나는 묘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월요일에는 돌비 엔지니어와 싸웠고, 화요일엔 베트남 직원에게 업무 지시를 내렸으며, 수요일엔 파키스탄 고객에게 견적을 보내는 일이 일상이던 날들이었다. 내가 글로벌한 인재라도 되는 양, 어깨가 하늘까지 치솟아 올랐다.


글로벌한 인재라면 모름지기 세계정세에도 능통해야 할 것 같았다. -직접 홈페이지에 찾아가긴 귀찮아서- 페이스북에 해외 언론사를 잔뜩 팔로우해놓았다.  BBC, CNN, 뉴욕타임스 등등. 좋아요를 몇 번 누르자 친구 신청이 물밀듯 들어왔다. 외국인 친구라니! 멋진걸! 아무 의심도 없이 수락하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똑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안녕, 나는 시리아에서 파견 근무하고 있는 군인(혹은 의사)야. 영국에 딸 하나 있는 이혼남이고 블라블라… 지메일 계정 좀 알려줄래?”-나는 해맑게 네이버 계정을 알려줬다. 사기꾼 입장에선  터지는 인간이었으리라-


쉴 새 없이 수다가 이어졌다. 영어 실력도 부족하고, 원체 말주변도 없던 나는 그저 “응, 응.”이나 묻는 말에 짧게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분명 시차가 있을 텐데 얜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수다를 떨지? 그러다 ‘로맨스 스캠’이라는 기사를 접했다. 뭐? 돈을 뜯어낸다고?? 판에 박힌 레퍼토리 자기소개를 하는 페친을 가차 없이 끊어내고 더 이상 외국인과는 페친을 맺지 않았다.


그러다 페이스북이 지고 인스타그램이 뜨기 시작했다. 리그램 방법도 모르고, 핫플레이스 사진도 없지만 일단 시도해보았다. 팔로워가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다 K를 만났다.


영국 글래스고에 살며 토목 영업을 한다고 했다. 이번에도 딸 하나 둔 이혼남이라는 게 걸렸지만 독특한 이름과 할머니가 동양인이라는 특이한 배경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K도 좀 수다가 많기는 했지만 영어수업이라고 생각하고 성실하게 디엠에 답했다.-물론 이번에도 주로 단답만 하는 역할이었다- 가끔 오류가 보이기도 했지만-잠깐, 1920년대에 동양 여자가 영국으로 유학 가서 너희 할아버지를 만났다고?- 그는 능글맞게 자신에게 너무 관심을 가지는 거 아니냐며 철벽으로 대응했다. 대화 주제는 주로 출장 다니는 곳이나 사업에 관한 이야기다. 대화의 끝은 언제나 한국에 가게 되면 만나자는 말이었지만 ‘언제 밥 한 번 먹자.’와 비슷한 거리감이었다.


한 달쯤 지나자 그가 갑자기 호칭을 바꾸기 시작했다. 나를 애인과 헷갈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태도가 급변하며 힘들다고 했다. 뭐야, 얘. 'just friend'라며? 요즘 많이 힘든가? 그냥 또 단답으로 넘겼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저 힘든 시기를 잘 넘기길 바랐다. 싱가포르 계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말을 들었을 땐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그러다 그가 운을 떼었다.

“헤이, 너는 내가 잘 되길 바라지?”

“물론이지!”

“이번 사업이 엎어지면 난 정말 불행할 거야.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싱가포르에 낼 세금이 부족한데 백 달러 좀 보내줄 수 있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몇 백만 달러 짜리 계약을 하는 사람이 단돈 백 달러가 없어서 얼굴도 본 적 없는 외국인에게 손을 내밀다니 코미디가 따로 없네. 알았다고 답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재차 보내줄 수 있냐고 물었다.-아마 내가 보낼 방법을 묻지 않아 답답했을 것이다-


"네가 나이지리안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한 달 동안 친구로 지내서 즐거웠어. 잘 지내.”

차단하고 신고를 눌렀다. 내 허영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소셜미디어로 인해 친구되기는 쉬워졌지만 사기치기도 그만큼 쉬워졌다. 아무런 갈등없는 얕고 넓은 관계. 선한 얼굴 뒤에 숨긴 다른 얼굴. 이게 우리가 추구 해야할 관계의 모습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Photo (c) by Oleg Magni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이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