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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Aug 29. 2019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독자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은 누구인가

고등학교 시절 일이다. 아마 1학년 1학기로 기억하는데, 학생들에게 한 마디 상의도 나누지 않고 여자 반은 가정 과목, 남자 반은 기술 과목을 배운다는 통보가 교무실에서 내려왔다. 주요 과목인 국영수가 아닌 기타 과목이었기 때문인지 아이들의 반응은 심드렁했지만 나는 심각했다. '나는 제2의 안도 다다오(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건축가)가 돼야 하는데! 왜 처음부터 기회를 뺏는 거야?!?' 어디에 말도 못 하고 혼자 속을 끓이다 급기야 학교 홈페이지에 익명으로 장문의 글을 올렸다. 대충 아래의 뉘앙스로.


‘성별을 근거로 멋대로 재단하고 편을 가르지 마세요. 학생도 배우고 싶은 것이 있고 선택할 권리가 있단 말입니다! 요리 싫어! 도면 그릴 거야!!’ 

-도면을 그리는 지금, 과거의 나를 매우 패고 싶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하필 다음 주가 학교 신문 발행일이었다. 신문 편집부 부원이었던 친구는 ‘익명의 기고자’ 운운하며 한 페이지를 할애했다. 가정 선생님은 첫 수업에 들어와 선택권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서운함이 담긴 목소리로 사과했다. 근질거리는 입을 견디다 못해 점심시간에 친구에게 말을 꺼냈다.

“사실... 익명으로 글 올린 거 나야.”

친구는 처음에 믿지 않았다. 평상시 소심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애가 그런 ‘쎈 글’을 쓸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결국 수긍한 후 꺼낸 첫마디는 이랬다.

“왜 그런 거야?”


소설엔 ‘화자’라는 개념이 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은 작가가 아니고 소설 속 인물 혹은 관찰자라는 의미다. 이는 에세이 등의 글쓰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고 해서 글의 화자는 내가 아니다. 말하는 사람은 나의 일부, 즉 페르소나일 뿐이다. -과장하자면 글쓰기도 일종의 연기이다. 이건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평상시에 소심했던 내가 대범한 페르소나를 끄집어내 양성평등을 외칠 수 있었던 것처럼.


글쓰기에서 페르소나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악플이다. 악플을 다는 사람은 나름 정의로운 혹은 ‘관종’의 페르소나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사회에선 평범한 페르소나로 생활하다 당황한 표정으로 고소장을 받는다.


우리는 글 한 토막에서 내 모든 걸 꺼내 이야기하지 않는다.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편집한 페르소나가 나를 대신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글은 언제나 왜곡될 수 있다. 보통은 내게 유리하지만 괴리가 심하면 불리해지기도 한다. 주의해야 한다.


또한 어떤 내용은 독자에게 생소하게 다가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자는 나의 일부를 보는 것뿐이다. 그가 내 복잡다단한 사연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그 사실을 기억하면 내 생각에 갇혀 불친절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실수를 피할 수 있다. 고등학생 때의 내가 제대로 자기소개를 하고, 완곡어법을 쓰고, 분노한 맥락을 설명했다면 선생님과 친구가 당황할 일은 아마 없었으리라.


Q) 평상시와 다른 페르소나가 불쑥 튀어나왔던 일화를 짧게 써보는 건 어떨까?




다음 매거진 글은 '글로 밥 벌어먹는 여자' 작가님의 <관심종자의 글쓰기>입니다. 글밥녀 작가님은 처음부터 방송작가를 꿈꿨을까요? 어떤 계기로 방송작가가 된 것일까요?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할지 막막하다면 지금《매일 쓰다 보니 작가》글을 추천드립니다. 꾸준하게 글을 쓰며 자신만의 무기를 단단하게 다진 작가의 노하우가 궁금한 분들은 매거진 구독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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