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온달’과 ‘눈의 여왕’ 이야기를 아시는지? 둘 다 여성의 노력으로 그녀가 사랑하는 남성이 갱생한다는 스토리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이런 이야기가 인기를 끈다는 건 비슷한 판타지가 존재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를 이끌어줄 어머니 같은 여성 파트너가 등장하는 판타지 말이다.
현대에는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변주도 생겨났다.-다 큰 성인을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 비슷한 시기, ‘남편은 큰아들’이라는 유행어도 널리 퍼졌다.
같이 잘 살자고 결혼했는데 한쪽에게만 보살핌과 이해의 의무가 지어진다. 그가 집안일에서 슬쩍 발을 빼도, 난감한 얼굴로 똥 기저귀는 갈 줄 모른다며 아이를 떠밀어도 ‘남편은 큰아들이니까’라는 마법의 문장은 그에게 면죄부를 준다.
남편만큼 배웠고, 남편만큼 곱게 자란 요즘 주부들은 그 상황이 당연하지 않다. 무언가 잘 못 되었다는 느낌이 불현듯 든다. 몇 번 이의 제기를 하면 ‘큰아드님’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넘기거나 나도 힘들다는 날 선 대답으로 반격한다. 이걸 두세 번 반복하다 보면 ‘아, 이래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거구나.’라며 체념하게 된다. 내가 다 떠안고, 입을 다물면 모두가 해피엔딩일 것 같다. 나만 빼고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간과한 것이 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가만히 입 다물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겔다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카이를 껴안고 울었다. 평강공주는 패물을 팔아 온달을 가르쳤다. 입을 다물고 나만 참는다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큰아들의 편의만 공고히 할 뿐이다.
말을 하자. 못 들은척해도, 나도 힘들다며 구시렁거려도, 계속 말을 하자. 어려운 일 같이 헤쳐나가려 한 결혼인데 왜 나만 떠안는 게 당연한가.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맞다. 그러나 나도 원래부터 4시간 자고 일어나 아침 먹는 사람 아니었다. 상황이 어쩔 수 없다면 바뀌어야 마땅하고, 그 상황은 엄마(aka.주부)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왜 내가 먼저 얘기해야 하냐고? 엎드려 절 받기 싫다고? 물론 그가 알아서 눈치껏 움직여주면 좋겠지만 눈치가 없으면 알려주면 되는 것 아닌가. 싸움도 자주 하다 보면 기술이 생기고, 감정이 실리지 않은 대화가 기적처럼 가능해진다. 싸우자는 말이 아니라 대화를 하자는 얘기다. 비난을 하지 말고 그냥 사실만 담백하게 전달하자.
“내가 요새 아기 때문에 잠을 못 자서 힘든데, ~은 자기가 맡아주면 안 될까?"
“저번에 ~ 맡겼는데 까먹었네? 오늘은 부탁할게.”
안다. 이게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다. 이건 단순한 ‘가정 내 평화’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다. 당신의 딸, 아들은 당신의 행동을 보고 배울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고 엄마의 희생을 당연시하지 않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도, 갈등을 드러내고 해결하는 게 집안 평화에도 오히려 이득이다.
사람은 바꾸기 힘들다. 하지만 남편은 큰아들이 아니라 당신이 선택한 평생의 동반자이다.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고,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이야기 하자. 대화를 나누자. 체념하고 살기엔 남은 인생이 너무 길다.
배경 출처, 삼성 VTR광고(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