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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Sep 23. 2019

폭력의 민낯

1990년대 사람의 값어치는,

아버지는 개그맨 S를 싫어한다. 아니, 증오한다. 예전엔 깐죽 개그로 전성기를 보냈고, 지금은 성실과 겸손의 아이콘으로 방송국을 종횡무진 활보하는 그를, 아빠는 지금도 눈에 띌 때마다 “저런 나쁜 x끼!”라며 치를 떤다. 그래서 그 개그맨 이름이 뭐냐면…으로 미투 폭로전을 하자는 건 아니고, 가끔 방송에서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난 궁금하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얼굴이 진짜일까, 아빠의 뇌리에 30년 넘게 증오를 남긴 그 얼굴이 진짜일까.


신촌 오거리에 ‘그레이스 백화점’이 굳건히 서 있던 시절, 아빠는 그곳의 배송기사로 근무했다. 엄마의 말마따나 ‘사람만 좋고 실속은 없는’ 아빠는 일보다 친구가 먼저였다. 그런 아빠가 동료의 뺨을 때린 S의 행동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사건 목격자의 딸일 뿐인 나는 마냥 아빠의 분노에 감할 수 없다. 주차대행원이었던 아빠의 동료가 그의 외제차를 긁었을 수도 있고, 무언가 크게 실수를 했을 수도 있겠지, 하고 기계적 중립으로 S를 변호해본다. 근데 그런다고 뺨을 때릴 수 있을까? 내가 그의 입장이라도 그건 모르겠다. 어떤 상황이 되어야 남의 따귀를 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걸까? 그러고도 아무 문제없이 넘어갈 자격은?


원인은 세 가지로 짐작할 수 있다.

1) S가 이성을 잃었거나,-제정신이 아닌 상태-

2) 주차 대행원이 심각한 패드립을 날렸거나,

3) 당시는 그래도 되는 시대 분위기였거나.

1)은 S가 멀쩡히 차를 끌고 나갔으니 아니고, 2)를 할 정도의 막장인 인물이 뺨을 맞고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 결론은 3)번만 남는다. 당시엔 그랬던 걸까. 언론이래 봤자 보도지침 받아쓰기가 전부이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 개구리 잡으러 간 아이들은 사라지고, 민주화 운동을 하던 대학생은 맞아 죽었다. 이 모든 것이 침묵 속에서 이뤄졌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배가 침몰되고, 건물과 다리가 무너져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잊혔다. 그렇게 사람이 값싼 취급을 받았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각성의 목소리가 나온 건, 꽤 많은 생명을 잃고 나서다.


S도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주차대행원의 뺨을 쳤으리라. 흔해 빠진 주차대행원 뺨을 치는 게 뭐 그리 대수였으랴. 그리고 지금은 그게 용납되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므로 또 조심하며 살고 있을 거다. 예의 겸손한 이미지를 내세우며.


한 사람의 얼굴은 이렇게 다양하다. 시대에 따라, 주변 환경에 따라 어느 것이 그의 진짜 얼굴인지는 본인도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얼마 전 지목된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의 어머니는 "그 착한 아이가.."라는 인터뷰로 공분을 샀다. 용의자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당시 그가 보기엔 여성의 목숨이 X값이었던 건지, 아직까지 '착한 아들' 가면을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으나 시대가 변했다. 더 이상 없어도 되는, 뺨 맞아 마땅한 사람은 없다. 용의자도, 그의 어머니도 자신이 사는 시대를 직시하고 이제는 용서를 빌었으면 한다. 시간에 묻히기를 바라며 버티기엔 원한이 너무 깊다.



-참고-

http://ch.yes24.com/Article/View/20169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u_kwang&logNo=150089252479


Background photo (c) by Melanie Wass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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