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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Jan 06. 2020

부모님 일 함부로 돕는 거 아닙니다

※ 친정어머님과의 갈등 과정을 쓴 글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부모님을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아주 불편할 수 있거든요.




열여덟 살 무렵, 부모님께서 이혼하셨다. 하도 자주 싸우던 분들이었기에 슬픔보다는 후련함이 컸다. 이제는 좀 조용한 집에 살겠구나... 하는 기대마저 들 정도로. 그 와중에 엄마는 나보다 일곱 살 어린 남동생이자 장손을 데려가는 대가로 살던 집을 받았는데, 그게 나도 모르는 새 서운한 감정으로 남았단 걸 안 건 15 년 후의 일이다.


슬퍼하기엔 바쁜 나날이었다. 새 집으로 이사를 했고, 곧 닥칠 수능을 준비해야 했으며, 이제는 따로 살게 된 엄마와 간간히 만남도 가져야 했다.


운 좋게 인서울 대학에 입학했으나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막연하게 고른 학과는 적성과 동떨어졌고, 내성적인 성격은 학교 적응에 발목을 잡은 데다가, 처음 해본 장거리 등교는 마지막 남아있는 에너지마저 쪽쪽 빨아먹었다. 십이 년 동안 모범생 코스만 밟아온 나는, 처음 이탈한 길에서 어찌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헤매고만 있었다.


그즈음 엄마는 돈을 모아 조그마한 식당을 인수하셨다. 빌딩 곳곳으로 음식을 날라야 하는 지하식당. 점심 파트타임으로 돕는 이모가 있긴 했지만 사람은 항상 들락날락했다. 전날 멀쩡히 퇴근하고 들어가 오늘 출근하지 않는 사람도 다반사였기에 모든 일은 기본적으로 엄마 몫이었다.


엄마와의 만남도 항상 그 식당이었다. 만날 때마다 엄마는 힘들다고 했다. 엄마가 안쓰러웠던 건지, 착한 딸 행세를 해서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었던 건지, 나는 이틀에 한 번꼴로 학교 수업을 마친 후 가게로 향했다. 청소와 수저 닦기 등 마감을 돕고, 다음날 만들 반찬 밑 작업 등등을 도왔다. 건너편 가게 이모가 "그 집 딸 진짜 착하네."라고 칭찬할 때는 조금 의기양양했으나 "가족끼리 당연히 돕는 거지."라는 엄마의 대답에 내 어깨는 금세 축 처졌다.


엄마는 배달이 도저히 힘들어 안 되겠다며 지하식당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숯불갈비집을 인수했다. 50평 정도 되는 홀에 엄마와 찬모 이모, 둘만 일한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당시 마침 나는 3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이 와서 도우라며 통보를 해왔다.


가족이라서 돕는다는 건, 꽤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설사 내가 자원했대도,  월급을 제대로 받았더라도, 엄마 집에서 살고 있었더라도 풀타임 근무는 쉽지 않았을 게다. 엄마는 딸이라서 게 지적했고, 나는 엄마라서 대들었다. 그렇게 방학 두 달 내내 엄마와 지독하게 싸우다 학교를 핑계로 그만두게 되었다. 엄마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를 접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결혼해 아이를 낳고 맡기게 되었다. 엄마는 항상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애 때문에 손목이 아파. 얘 또 어질렀어. 집은 왜 이렇게 더럽니. X서방은 왜 살갑게 말을 안 붙이니. 애아빠 옷이 저게 뭐니. 넌 남편 몸매 관리도 안 해주니. 반찬거리도 안 사놓고 뭐 하는 거니..."

죄인이었다. 애 맡긴 죄인. 상사가 도끼눈을 뜨던말던 칼퇴하고 뛰쳐나와 엄마를 돌려보내드리고, 밤 새 집안일을 하고, 엄마의 날 선 말을 남편에게 돌려 말하느라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 것 같을 무렵, 둘째가 생겼다.


회사에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통보하고 둘째가 어린이집을 가기 전까지 내가 돌보기로 했다. 더 이상 엄마에게 신세를 지면 안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막달 산전검사를 마치고 산부인과를 나서던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집에 계신 거예요?"

"어..."

"둘째 어린이집 문제 때문에..."

그러자 전화 건너편에서 온갖 종류의 막말이 들려왔다. 왜 나에게 상의 한마디 없이 너 혼자 결정하냐, 너 지금 돈 얼마 줬다고 갑질 하는 거냐 등등. 여태껏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던 나는 당황스러워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안 하고 말이야! 그러면 천벌 받아!!"

내 기억에, 고맙다는 말은 문자로 자주 했다. 매일 얼굴 보고 입으로 말하지 않아 서운했다는 건지, 힘들었음을 다시 토로하는 말씀인지 알 길이 없었다. 배가 슬슬 당겨오고 속이 울렁거렸다. 나 임산부인데. 천벌 받는다는 말이 저리 쉬울까.

"엄마도 안 했잖아."

"뭐??"

"엄마도 내가 가게일 도울 때 내 등 뒤에 대고 뭐랬어. 가족이니까 당연하다며."

엄마의 고함이 들려왔지만 그냥 끊었다. 차단했다.


분이 안 풀린 엄마는 위의 대화를 남편에게, 시모에게, -이혼해 이젠 남인- 고모들과 할머니에게 되풀이했다. 모두가 나에게 용서를 빌라 종용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막달부터, 두 아이를 기르며 육아전쟁을 하기까지 나는 그들에게 우리의 싸움을 몇 번이고 복기하며 설명해야 했다. 어느 날은 엄마 친구분이 불쑥 집으로 찾아와 따지기도 했고, 전화로 화해를 강요하는 고모 덕에 소아과에서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고모, 나 엄마 때문에 정신 상담까지 받고 있어! 제발 그만 해요!!"


안다. 옛날 내가 식당을 돕던 일과 아이를 봐주시던 일은 분명 다른 일이다. 둘을 비교해서는 안됐다. 그러나 당시 일 때문에 서운했던 앙금이 아직 남아있어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한건 사실이다.




이혼했다면 좀 서먹하게 지냈어야 했다. 부탁을 받았다면 다른 핑계로 거절하던가 스스로 납득할만한 급여를 요구해야 했다. 마냥 '착한 딸 콤플렉스'에 빠져 도와봤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스스로가 원해서 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시켜서 하는 경우는 오죽할까.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이 미국의 네 배란다.(https://www.yna.co.kr/view/AKR20190929059600002) 그중 상당 수가 가족의 노동력 지원에 기대고 있지 않을까 짐작이 간다. 자녀도 엄밀히 말하면 타인이다. 설사 그 일로 버는 돈이 자녀의 입에 들어간대도, 타인의 시간과 노동력을 뺏은 것에 대한 자각과 마음의 표현은 있어야하지 않을까.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가족은 지옥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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