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이 시작하던 시절부터-대략 5~6살쯤이었지 싶다- 우리 집구석엔 매년 겨울마다 트리가 있었다. 내 키만 했던 커다란 트리. 깜빡이는 꼬마전구를 보며 산타 할아버지에게 "미미인형 주세요~"하고 또박또박 카드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다음날 -어린 시절임에도 엄마와 필체가 비슷해 이상했던- 답장과 예쁘게 포장된 선물이 트리 아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운 겨울을 끔찍이 싫어했음에도 알록달록했던 트리만은 유독 좋아했던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물론 모든 어린아이가 그랬겠지만.
내 키만 했던 트리가 사실꽤 작다는 걸 깨달은 건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부모님이 방산시장에서 수입식품 가게를 하던 시절 미제를 많이 먹어서인지, 증산동에서 닭을 튀기던 시절 남은 닭을 많이 먹어서인지, 나는 잔디인형처럼 쑥쑥 자라 어느새 반에서 맨 끝번호를 도맡아 하는 멀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트리는 어느새 내 어깨에서 팔꿈치로, 팔꿈치에서 손목으로 점점 아담하게 변해갔다. 내가 자랐던 여러 해 동안 트리는 한결같이 겨울이 시작되면 어디선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나와, 겨울이 끝날 무렵 고이 접혀 어느 구석에서 다시 먼지를 뒤집어썼다.
그런 트리가 슬슬 지겨워질 무렵의 어느 겨울, 숙제 때문에 친구네 집에 놀러 가게 되었다. 그 집거실 한편에 천장에 닿을만한 트리가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하필 친구와 내가 자리 잡은 곳도 거실 한편 식탁이라 나는 계속 트리를 쳐다보며 대화를 나눠야 했다.-아니, 그냥 내가 계속 트리를 흘끔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와, 세상에 저렇게 큰 트리도 있구나. 진짜 예쁘다. 넋을 놓고 보다가 친구가 "너 근데 집에 언제가?"라는 말을 꺼내고 나서야 뭉그적거리며 그 집을 나섰던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오니 우리 집 트리는 참 작았다. 이제는 내 허리춤에 오던 일 미터 남짓의 트리. 그제야 우리 집의 가난이 조금은 피부로 다가왔다. 몇 달치 교재비를 학원 선생님이 안 받고 있었음을 알았을 때도, 너희 집 형편 때문에 반장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들었을 때도, 부모님이 없는 텅 빈 집에서 티브이를 보며 버텼을 때도 그저 헤헤 거리며 넘겼던 가난이 어이없게도 트리 하나로 현실이 되었다. 갑자기 그 트리가 보기 싫었다. 산타할아버지에게 작게 기도를 했다. "내년에는 이 트리를 안 보게 해 주세요."
소원은 이루어졌다. 계속 불화였던 부모님의 싸움이 다음 해에 절정에 이르러 결국 두 분이 갈라서게 된 것이다. 아빠는 나를 데리고 타지역으로 이사를 갔고, 남동생과 엄마는 원래 살던 빌라에 남겨졌다. 이사를 하는 사이 정리를 한 건지, 잃어버린 건지 트리를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조금 후련했으나 곧 그리움이 밀려왔다.
세상엔 친구 집에 있던 트리보다 더 큰 트리도 많았다. 서울시청 앞이나, 영등포 타임스퀘어 앞이나, 서울역 앞에는 십 미터도 넘어 보이는 크고 화려한 트리들이 즐비했다. 그 앞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어도 그 트리는 예전 우리 집의 꼬마 트리만큼 내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또 무럭무럭 자라 아이를 위해 트리를 사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
사실 트리는 사고 싶지 않았다. 현재 사는 집이 내 집이 아닌 이상, 가능하면 짐을 하나라도 줄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놈의 마트가 문제다. 우리 부부는 지난 육 년간 잘 버텨왔으나, 물끄러미 트리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에 무너지고 말았다. 결정만 된다면 핑계는 무궁무진하다.
"이번에 00 페이로 7만 원 이상 결제하면 만원 상품권 주니까, 사자!"
"그래, 뭘로 살까? 너무 큰 거 말고... 이 하얀색은 어때?"
"아냐. 이게 나아."
남편은 이미 꼬마 트리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기본형이 제일이라며 일 미터 남짓한 박스를 집어 든다.
매장에서 볼 때는 설마 했는데 집에 와서 꾸며보니 똑같다. 지금 그 트리는 어린 시절의 꼬마 트리가 환생한 것처럼 우리 집 거실 한편에 있다. 아이는 그 시절의 나처럼 제 키만 한 트리를 신기하게 쳐다보곤 한다. 아마 아이도 크면 이 트리가 지겹고 부끄러워질까. 그리고 조금 더 크면 그리워질까.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