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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Jul 20. 2019

19층에서

‘휘이잉~’

바람이 불고 있었다. 늦가을, 19층 계단실 창가에 서서 맞는 바람은 팔에 닭살을 돋게 만들기 충분했다. 당시 살던 아파트의 최상층인 19층 계단실 섀시 창문은 높이가 꽤 높았다.-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아래층 창 높이가 허리쯤이라면 당시 19층 창 높이는 가슴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난 그 높은 창틀에 기대 고개를 내밀고, 이걸 어쩌지, 하염없이 아래 화단을 내려보고 있었다. 홧김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층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이런 광경은 상상하지 못했다. 다리를 가슴 높이까지 찢어 창문에 매달려 뛰어내려야 하나? 암만 자살이래도 모양 빠지는데. 고민하다 포기하고 터덜터덜 내려왔다. 


“그래서 자살을 포기했어요.”

여기까지 나의 말을 듣는 상담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와, 이 표정은 흡사 아프리카 난민 보는 표정인데? 과거 우울 경험을 얘기해보라 해서 가볍게 꺼낸 이야기인데 주제가 꽤 어두웠나 보다. 그럼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10년 전 늦가을, 아빠에게 폭언을 듣고 19층으로 무조건 뛰어 올라갔다. 창가에 서서 잠시 고민을 하다 한층 위의 기계실로 올라갔다. 사방이 막힌 그곳은 당시 남자친구와 애정행각을 자주 벌이던 곳이다. 이런 짓도 하고, 저런 짓도 하고… 젊은 혈기에… 흠, 흠. 그런데 어둠 한가운데 하얀 종이가 보인다. 주섬주섬 폴더폰을 열어 불빛으로 비춰보았다.

‘※경고※

최근 이 구역 cctv에 부적절한 행동이 찍혔음.

애정행각, 음주 등의 적발 시 고발 조치하겠음.’ 


“그래서 등골이 서늘해져 바로 뛰어 내려왔죠.”

상담사의 표정이 뭔가 많이 묻고 싶은 것을 애써 참고 있는 표정이다. 서로 암묵적으로 더 이상 묻지도 말하지도 않기로 합의한 듯 상담실이 고요하다. 우울증 이력이랑 거리가 있긴 하지. 다시 정정해볼까? 



20대 초반 시절 어느 늦은 밤, 자살을 결심하고 같은 동 19층으로 올라갔다. 그게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 같아 보였다. 창문에 기대 창밖을 보고 있는데 삐거덕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1903호, 아니면 1904호 아저씨가 나온듯했다. 

‘어떡하지? 그냥 창 밖 구경하는 척할까? 갑자기 도망가는 것도 이상한데?’ 

마음속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데, 아저씨는 미동도 없었다. 나를 쳐다보는 듯 뒤통수가 서늘하다. 2시간 같은 20분을 팽팽하게 대치했다. 슬슬 다리가 아파왔다.

“야.”

“네?”

“비켜. 담배 피게.”

아무렇지 않은 듯 침착하게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내려가는 내내 뒤통수가 따가왔다. 


“그래서 그냥 내려왔죠, 뭐.”

이번엔 난감한 표정. 하아... 어렵네. 그럼 이건? 



19층 계단실 창문에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내가 이 세상에 사라지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차가운 손이 떨려왔다. 결단을 내리고 창틀에 다리를 올린 순간, 

“엄마~!!!”

멀리서 아이 비명소리가 들렸다. 우당탕! 창턱에서 안으로 떨어졌다. 덜컥 겁이 났다. 누가 날 봤나? 에이, 설마. 근데 이것도 아픈데 저쪽으로 떨어지면 더 아프겠지? 살아있는 게 낫지 않을까? 나중에 이것도 기억하게 될 거야. 어쩌면 누구와 웃으며 얘기하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죽지 않고 여기서 말하고 있네요.”

“누구 비명이었던 것 같아요?”

“글쎄요. 근방 놀이터에서 들린 소리였겠죠. 어린아이 목소리였어요. 우리 딸 목소리랑 비슷했던 것 같네요.”

“한밤중 19층이었다면서요? 그게... 가능할까요?”

“아...”

정말 진이 목소리랑 비슷했는데. 어쩜... 똑같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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