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을 뒤지다 스티커 사진이 툭 떨어졌습니다. 긴 생머리에 주름 하나 없이 보송한 이십 대의 제가 웃으며 브이를 그려 보이고 있네요. 그 시절의 저는 확실히 아름다웠습니다. 연예인처럼 객관적으로 예뻤다는 게 아니라, 갓 어른이 된 스무 살 만의 풋풋한 아우라가 있었죠.
지금은 삼십 대 중후반, 이마에 제법 주름이 보이고, 밤샘 한 번 하면 회복이 더딥니다. 매일 한 움큼의 영양제를 먹고, 좋다는 화장품을 바르고, 할부로 지른 엘이디 마스크를 뒤집어쓴대도 절대로 이십 대의 피부와 체력으로 되돌릴 순 없지요. 진시황이 중국을 발칵 뒤집어도 못한 걸 제가 무슨 수로 하겠어요?
여기까지 읽은 독자님은 "그럼,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거야?"라고 물을 수도 있겠네요. 아니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름다움과 체력을 포기하더라도 저는 현재에 남을 겁니다. 풋풋함의 다른 말은 미숙함이고, 자유로움의 다른 말은 불안정이니까요. 어리기에 배려받았지만 어리다고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가족-일-연애-우정 어느 하나 안정적이지 않았기에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홀로 버텨야 했습니다. -흠,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자살 시도를 하고도 용케 이십 대를 버텨왔군요. 조상님께 큰절이라도 해야겠습니다.-
지금은 제 옆에 가족이 있습니다. 지X같은 와이프의 성격을 받아주는 남편과, 마음이 추워지면 작고 따스한 손으로 엄마를 달래주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예전엔 거리 두는 법을 몰라 미친 듯이 싸우던 친정은 이제 안전거리 밖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보기만 해도 자존감을 건드리던 친구 관계는 이제 진심 어린 축하가 가능할 정도로 성숙해졌습니다. 누가 다가오면 상처 받을까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빠짝 세우던 저는 이제 제 발로 새로운 모임에 들어갈 만큼 마음이 단단해졌습니다.
혹자는 점점 무거워지는 의무가 거북해 다가오는 세월을 도리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은교>의 노작가가 지적했듯, 늙음이 벌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 시절의 제가 힘들게 노력해 도착한 지금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노력을 바탕으로 사십 대, 오십 대의 저도 포기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