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e Mar 18. 2019

어느 0개 국어 능력자의 고백

공대생의 심야 서재, 글쓰기 Basic Class 4기 후기



“저는 0개 국어 능력자인데요”

"미씨는 그래도 영어 되니까, 이거 가능하지?"라며 해외 업무를 떠넘기는 상사의 입에 발린 칭찬에 답했습니다. 그날 아침 대표님은 업무 보고를 듣다 “저 삼순이 왜 또 버벅대? 나가!”라며 화를 내고, 도면 승인 문제로 옥신각신하던 미국 협력사 엔지니어는 “번역기라도 쓰라"며 짜증을 냈습니다. 화술이 부족해 그들에게 한마디 항의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말을 능숙하게 하지 못합니다-긴장하면 불쌍하리만치 어눌하기까지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캐드, 포토샵, 3D맥스 등의 디자인 툴, 그리고 글쓰기. 그 수단들은 입을 대신하여, 손가락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툴 사용은 업으로 먹고 살만큼 능숙하지만, 글쓰기는 내성적 성격처럼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고 독백만 주절거렸습니다.


언어는 말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글로도 존재합니다. 정제되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지는 생각을 모아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조각의 감정을 블로그에 비밀글로 끄적였습니다. 비밀글은 차곡차곡 쌓였지만 글쓰기 실력은 제자리였습니다. 긴 호흡으로 깊은 사유를 나열하는 다른 블로거들이 부러워 틈틈이 구경도 하고 댓글을 남기며 소통 했지만, 글실력은 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습니다.  


이번 수업을 하며 긴 글에는 긴 시간과 많은 생각, 그리고 정리에 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 고민도 없이 단숨에 멋들어진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건, 천재나 가능하다는 걸 알았습니다-아님, 정말 철저하게 단련한 글쓰기 고수거나-. 성장이 부진한 아기처럼 많은 시간을 주저앉아 왜 안 되냐 칭얼대기 전에 찾아서 공부하고, 열린 공간에 내어놓고, 피드백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공심님과 문우님의 도움으로 제 글은 이제 걸음마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글을 통해 저의 언어는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눈 앞의 백지가 막막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걸까?’

’말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쓴다던데, 난 포기해야 하는 걸까?’

자책하던 날도 있었습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라도, 광인이라도 누구나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시각과 그걸 해석하는 생각과 그로인한 철학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 잘 털어서 예쁘게 늘어놓을 기술이 없었을 뿐입니다.


글 잘 쓰는 사람 중에 말 잘 하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을 뿐, 그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크툴루 신화'로 '미국 호러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작가 H.P.러브크래프트는 말이 어수룩해 동료 작가와 편지로만 교류했다지요. 유명한 추리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는 문지기에게 저지당했으나 항의 한마디조차 못하는 바람에 자신의 파티에 참석하지 못한 일화가 있습니다. 말이 서투른 저는 말과 글 실력이 동일하지 않음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글쓰기라는 새로운 언어를 익혔습니다. 더는 ‘0개 국어 능력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습니다. 사실, 기쁩니다. “나도 쓸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생겼어!!”라고 소리치며 방방 뛰고 싶습니다-하지만 아직 주변에는 비밀입니다-.


새벽이면 까치집 머리를 하고 노트북 앞에 앉아 글쓰기 모드로 변신하는 자신이 놀랍습니다. 휴직 후, -하루의 반나절을 홀로 버티는-입은 전보다 느려졌지만, 글쓰기를 통해 생각은 빠르고 다채로워졌습니다. 살면서 아무 대가없이 많은 고민을 하며 이야기를 풀어내던 때가 있었을까요?


아직 갈 길은 멉니다. 계속 노력해야 제 글도 성장할 수 있겠지요. 그 와중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글쓰기 실력을 키워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이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싶은 소망이 생겼습니다. 멀죠, 많이 멀었죠. 몇 걸음 걷다 힘들다며 주저앉을 수도 있겠죠. 그럼 앉아서 조금 놀다, 엉덩이 털고 일어나 또 글을 쓰러 가겠습니다. 글쓰기는 이제 제 언어가 되었고, 잠시 묵혀둔대도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새로운 언어를 알려주신 공심님께 감사드립니다.



https://brunch.co.kr/@futurewave/708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음악 덕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