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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Dec 31. 2019

틸 그린 백을 찾아서

모두의 한 해가 훈훈할 리 없으니까

아마 이 글은 매우 우울할 것이다. 첫 문장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촉이 온다. 내 기분은 남편의 야근 일수와 반비례하는데, 요 며칠 새 그는 자정을 넘겨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그리고 당당하게 내년 유 월까지 계속 이럴 거라고 통보해왔다-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2019년을 복기하고 2020년을 계획하는 글을 쓴다는 게 괜찮을까 싶지만 뭐 어때! 어떤 책에서도 낙관론자보다 비관론자가 야생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마음먹고 어두컴컴한 글을 쓸 작정이다.


이번 해는 다사다난한 해였다. 글쓰기 수업을 듣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육아휴직을 끝내고 퇴사 후, 새 회사에 들어가 적응이 될 무렵 반년 만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퇴사하고, 십이 월 현재 전업주부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다. 지금은 마치 방전된 배터리처럼 새로 직장을 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력서는 올렸으나 적극적인 시도는 한두 번 선에서 멈추고 말았다.


한 해에 퇴사를 두 번 한 셈인데, 육 년을 다닌 전전 직장보다, 반년밖에 다니지 않은 전 직장에 할 말이 많다. 퇴사 사유 중에서도 최악인 임금체불이라니, 양아치들. 월급을 밀려놓고 해사하게 웃는 낯으로 일하기를 원했던지, 나가는 마당에 따로 불러서는,

"내가 미씨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그 성격으로는 회사 다닐 수 없어."

라고 했다. 암요, 임금 체불되는 악덕 회사에 누가 다닐까요.


'애 둘 엄마'라는 타이틀에 그저 그런 이력. 눈을 낮추고 들어간 소기업에서 터진 뻔한 전개. 돈도, 버틸 기운도 모두 똑떨어졌다. 여기까지 버틴 것도 나름 대단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회사를 그만둔 후 긴축재정에 들어갔다. 시장이 멀어 구석에 처박아둔 온누리 상품권으로 장을 보고, 냉장고를 파먹었다. 당근 마켓 앱을 깔고, 안 쓰는 물건을 뒤져 중고거래에 올려놨다. 날이 풀리면 도보로 등 하원 하고, 활동 반경을 최대한 줄였다. 통장은 두툼해졌을지 모르나, 내 정서는 납작해졌다.


책을 읽었다. 퇴사 후, 대략 이틀에 한 권 꼴로 게걸스레 책을 먹어치웠다. 책에 집중하느라 우울하다던가, 불안하다던가 따위의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책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었는데, 바로 '구매욕'이었다. 특히 가방이 문제였다.


몇 달째 초록색 가방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틸 그린(teal geen) 컬러의 톡 튀는 가방을 갖고 싶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이 여자 정신 나갔군'하고 생각하겠지만, 아직 정줄을 붙잡고 있어 결제 버튼을 누르진 않았다. 튀는 가방을 들고나갈 일이 없으니까, 예쁜데 비싸니까, 싼데 안 예쁘니까, 싸고 예쁜데 카피니까, 돈이 아까우니까. 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오조오억 개인데 몇 달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다. 나는 고민을 즐기고 있는 중이란 걸.


정말 나는 회사 체질이 아닌 걸까, 누굴 가르치는 건 자신이 없는데, 프리랜서를 할 능력은 있나, 창업은 아무나 하나, 뭘 새로 배워야 할까. 어디에도 발을 떼지 못하고 고민만 하다 새해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서른여섯이나 먹어서는 스물여섯 때의 고민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는 게 우습다.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


그래, 나는 아마 계속 고민만 할 것이다. 책으로 탑을 쌓아놓고, 그 속에 숨어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를 목놓아 부르겠지. 계속 위시리스트만 쌓아놓고 아무것도 손에 들지 못할 것이다. 안전한 게 제일이라 되뇌며. 그러다 무너진 책더미에 깔려 사망할게다.


그러니 그렇게 살지 않겠다. 책을 덮고, 핸드폰을 뒤집고,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벌여봐야겠다. 스스로가 비웃는 허튼짓이라도 무언가 시도해봐야겠다. '안전은 미신이다'라는 헬렌 켈러의 말처럼. 그러면 내년 연말엔 선명한 초록색 가방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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