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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고래 Mar 11. 2020

선의의 거짓말은 필요할까?

대한민국 어른이들의 딜레마

작년에 글쓰기 클래스를 수강했는데, 첫 과제가 논설문 쓰기였다. 주제는 '선의의 거짓말은 필요할까?'.


처음에는 고등학교 논술 과목에서나 볼법한 진부한 주제라고 생각했다. 아니 근데 웬걸, 막상 글을 써보니 생각보다 심오하고, 생활 밀접한 주제라는 걸 깨달았다. 특히 사회적 관계 관리와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이 함께 요구되는 대한민국 어른이들에게 쉽지 않은 주제였다.


아래 과제로 썼던 글을 공유해본다.




‘거짓말’이란 단어를 보면 보통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거짓말은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는 이기적 행위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이기적 거짓말은 사회적으로 지양되어 왔다. 도덕적 비난은 물론,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었을 때는 사기죄로 처벌받기까지 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기적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은 모두가 동의하는 상식이다.


하지만 현대는 물론, 오랜 과거부터 찬반이 엇갈려왔던 거짓말이 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 혹은 사회 전반의 이익을 위해 하는 이타적 거짓말, 바로 선의의 거짓말이다.



일반적으로 선의의 거짓말을 찬성하는 측은 목적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비록 거짓말 자체는 나쁜 것이지만, 목적이 선하고 정의롭다면 이는 용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을 반대하는 측은 행위 자체의 선함을 중요하게 이야기한다. 목적의 선악을 따지기 전에, 행위 자체가 선에 부합해야지, 목적을 위해 행위를 정당화하다 보면 결국 선과 정의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찬반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실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나는 선의의 거짓말은 경우에 따라 지양 혹은 지향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선의의 거짓말을 지양해야 경우


먼저 지양돼야 하는 경우이다. 이는 선의의 거짓말이 소소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때이다. 외모에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친구에게 거짓으로 외모에 대한 칭찬을 한다던지, 발표를 망친 동료에게 좋은 발표였다고 이야기해주는 식의 거짓말이다. 이렇게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거나 위로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잔인하더라도 진실을 말하던지 아예 피드백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소소한 선의의 거짓말이 전반적으로 만연해지면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사회를 상상해보자. 처음에는 상대방의 배려에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방의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더해서는 이미 의도가 파악된 선의의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대로의 효과가 없어질 것이고, 진심으로 건넨 이야기는 선의의 거짓말로 오판돼 오해를 일으킬 것이다. 결과적으로 목적하던 선의 효과는 사라지고, 오해와 불신이라는 부작용만 남게 될 공산이 크다.


소소한 목적이라면 불편한 마음을 앉고 선의의 거짓을 전하는 것을 지양하자. 대신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진실을 전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지속 가능하고 발전적이다.




2. 선의의 거짓말을 지향해야 경우


선의의 거짓말을 지향해도 될 때는 목적이 중대하면서도 보편타당한 경우이다.


해당 경우를 편의상 '중대한 선의의 거짓말'이라 해보겠다. 이런 중대한 선의의 거짓말은 쉰들러 리스트 영화를 떠올려보면 좋다. 이 영화에서 쉰들러는 학살이 예정된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천여 명의 유대인을 구출해낸다. 만약 쉰들러가 이 상황에서 ‘거짓말은 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살을 방관했다면 어떨까? 우리는 유대인 천여 명이 학살됐지만 행위가 자체가 선했으므로 도덕적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혹은 유대인 천여 명의 목숨을 구했지만, 선의의 거짓말을 했기에 쉰들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말할 수 있는 있을까? 학문적 관점에서 논의를 진행해볼 수는 있으나, 현실에서 우리는 중대한 선의의 거짓말을 용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럼 어디까지가 중대하고, 보편타당한 것인가?’ 그 기준은 시대에 따라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통용될 수 있는 절대불변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머리를 맞댄다면 절대적이진 못해도 현실적인 기준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당 주제에 대한 논의 발전과 함께 사회의 성숙도 이뤄질 수 있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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