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을 통한 삶의 전환
파리 지하철에는 종종 짧은 시구절이나 격언이 광고란에 붙어있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거기서 공자의 명언을 읽었습니다. ‘사람은 인생을 두 번 산다. 두 번째 삶은 인생을 오직 한 번 산다는 걸 깨달을 때 시작된다.’ 한글로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찾을 수 없는 걸 보니, 공자가 아니라 대충 아시아 어딘가에서 유럽으로 흘러든 교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격언이긴 하지만, 그럴듯하지 않나요? 단 한번밖에 없는 인생, 당신은 첫 번째 삶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이미 두 번째 삶을 시작하셨나요?
제 두 번째 삶은 정말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과는 무척 다른 삶을 살던 시절, 한참 심리 상담을 받던 때였습니다. 은은한 은발에 수수하지만 결이 좋은 옷을 입던 중년의 여성 상담사였죠.
“그러니까,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학업을 계속했던 거지요.”
상담 시간의 9할은 내가 떠들었는데, 그녀의 이 한 마디에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사실할 말은 많았죠. 부모님은 한 번도 대학원 진학을 격려한 적이 없는데요, 아버지가 사회학과 진학에 얼마나 난색 하셨다고요. 저는 제 고집이 상당히 센 사람입니다. 유학도 남들 안 가는 프랑스로 가고, 남들이 돈이 안된다 뜯어말리는 박사과정까지 온 걸 보면, 비주류 성향이 충분히 증명된 거 아닌가요? 나는 내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소음처럼 맴도는 생각들과는 다르게, 이 지적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진실 때문에 여러 생각들이 부유물처럼 머릿속에 떠올랐겠지요. 다르게 풀어보면, 나는 그때까지 배운 대로 살았습니다. 보기에 좋은 삶, 여기저기서 받은 인상과 남들이 하는 말에 기반해, 저기 밖에 있는 좋아 보이는 무언가를 군복에 훈장 달 듯 덕지덕지 붙이면 성공한 삶을 사는 거라고 생각했죠. 주변의 암묵적 기대를 너무나 성공적으로 내면화했기 때문에 성공하라는 압박을 굳이 더 받지 않아도, 능동적으로 알아서 스트레스받으며 우울증에 걸리도록 자기실현을 완성해 내었죠.
사실 나 스스로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와는 큰 상관이 없었습니다. 불굴의 의지는 어찌 보면 독입니다. 평생 무의식적으로 학습한 외부적 기준을 따라, 하던 대로 자신에게 계속 압력을 행사했다가는 얄팍한 유리병처럼 파삭 깨져버릴 정도로 삶이 아슬아슬한 시기였습니다. 그 얄팍한 삶은 결국 완전히 부서지었습니다. 통쾌할 정도로 산산 조각난 첫 번째 삶의 파편들에서 두 번째 삶을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인생에서 보기에 좋은 삶을 지향했다면, 이제는 느끼기에 좋은 삶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외면이 어떻게 보이든, 나에게 진실된 것만을 따르는 삶, 철저하게 내 안에 있는 내적 나침반을 따르는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의지보다는 욕망, 생각보다는 느낌, 의무보다는 바운더리를 선택하는 연습이죠. 의지, 생각, 의무에 기반한 삶이 나빠서 거부한다기보다는, 양팔저울의 균형을 조정하듯 습관을 의식적으로 바꿔 나갔습니다.
막아놓고, 닫아두고, 애써 억누르며 참아왔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터졌습니다. 막혀있던 것들이 흐르기 시작하니 혈색이 돌고 색기가 오르더군요. 의미 없는 만남이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나 자신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뭐 하나라도 더 얻어내려고 쥐어짜는 습관이 사라졌습니다. 언뜻 판단하기에 성공적이지 않으면, 남들보다 잘나 보이지 않으면 나 스스로를 비난하고 힐책하던 못된 버릇을 고쳤습니다. 나 자신을 견디지 못해 숨거나, 의식을 꺼버리려고 드라마를 몰아보는 기괴한 숨바꼭질도 그만둘 수 있었습니다. 내가 뭘 잘해야지만,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일이나, 엄청나게 중요한 과제를 수행해야만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왜곡된 믿음에서 드디어 벗어나, 예민한 식물을 가꾸듯 스스로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나 자신을, 내 삶을 좋아하게 되었죠.
편의상 첫 번째 삶을 로봇형, 두 번째 삶을 식물형이라고 불러 보지요. 성취 지향, 외부의 평가나 한 사람의 기능을 중심으로 조직된 삶이 로봇형입니다. 로봇형 인간들에게 기능이나 실적은 그 자체로 너무 중요해서, 균형이 파괴되고 사람이 황폐해지도록 에너지를 탕진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식물이 자라고 꽃을 피우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지요. 식물형 삶의 세계관을 들어보시겠어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무한히 넓은 빈 공간에, 아주 뜨거운 불 덩어리가 떠있고, 우리는 그 불덩어리 주변을 회전하는 거대한 암석 표면에서, 운 좋으면 백 년 정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나를 알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알던 모든 사람들도 언젠가 한 명씩 흙에 묻히겠지요.
두 번째 삶은 인생을 오직 한 번 산다는 걸 깨달을 때 시작된다.
당신의 두 번째 삶은 오늘 어디로 향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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