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회가 된 변화

by 구일영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환경에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다. 인류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그 이유는 자명하다. 모든 생명은 항상 생존을 위해 항상성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도 이와 같은 커다란 생명 유지의 관점에서 일관적으로 진화했다. 깊숙이 자리한 도마뱀의 뇌라고 불리는 변연계는 위험을 감지하고 안전을 추구하도록 설계됐다. 배고픔에 대해 후각이 발달하고, 적의 출현에 대해선 귀가 쫑긋하는 것은 모두 변연계의 작동 때문이다. 변연계의 기민한 대처에서 보듯, 인간이 변화에 민감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것은 변치 않는 자연의 본능이다.


불행히도 현대 사회는 복잡하고 예측 불허의 사건으로 넘쳐난다. 모두를 예측하여 편하게 대처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그런 경우는 행운이라 불릴 만큼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인은 누구나 언젠가 자신과 관련된 일이 변화할 거라 가정하고 살아야 한다. 복잡한 현대 사회는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안정을 추구하는 본능에 반해서 살아가야 한다며, 스스로 변화의 순간을 기꺼이 감수하는 모험은 찬양된다. 심지어 안정에 취해 있는 사람은 발전을 도모하지 않는 낙오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전통을 꾸준히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항상 무엇인가를 변화시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숙명에 우리는 노출돼 있는 셈이다.


외국계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회사로 이직했던 일은 내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긴 시간 동안 한 조직에 몸담게 되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갑자기 오래도록 해 온 영업이 아닌, 마케팅 일을 하고 싶었다. 마침 불황으로 조직 축소를 위해 본사로부터 신임 사장이 부임한 것도 나의 이직의 이유에 한몫했지 싶다. 막상 익숙했던 조직을 떠나려니 여러 가지로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변화의 기미를 감지하고,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뜻대로 국내 대기업으로 이직했다. 이직하고 나니, 가장 눈에 띄게 변화되었던 것은 통근과 업무 내용이었다.


영업 조직 중심의 외국회사라 영업사원들에게 한 대씩 자가용 차량을 지원했던 덕분에, 난 신입 사원 시절부터 단 한 번도 대중교통으로 출근한 적이 없었다. 반면, 이직한 회사는 대기업이라 그 수많은 직원을 사무실 건물 주차장에 주차하지도 못했고, 또 차량을 지급하지도 않았다. 대중교통으로 하루에 3~4시간을 출퇴근에 할애해야 했다.


업무 또한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이 달랐다. 일하는 방식이 실무보다는 보고 중심이었다. 경영학 용어들의 지식이 필요했다. 나는 역마살 낀 것처럼 국내외를 돌아다니기만 했지, 아는 건 별로 없었다. 이직 초기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 했음은 어쩌면 당연했다. 작성된 보고서는 내용을 충실히 담지 못했다. 누가 봐도 실력 부족이었다. 그마저도 상신된 보고서는 반려당하기 일쑤였고, 매일 야근을 해야 했다. 죽고 싶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번아웃이 왔을 때 나를 구해준 것은 독서였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의 『몰입』을 보면, 무엇인가에 몰두하는 행위는 뇌를 쉬게 하는, 일명 멍 때리는 것이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행복하게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딱 내가 그랬다. 주말에 독서를 하는 시간만큼은 아무 생각 하지 않고 내용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살 것 같았다.


힌트를 얻은 나는 본격적으로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운전 때문에 의미 없이 버려야 했던 출퇴근 시간이 책을 읽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으로 변신했다. 기왕이면 업무에 도움이 되는 경영 경제 분야 책을 읽으려 노력했다. 변화를 맞아 걱정하거나 불평만 하던 나는 슬슬 재미를 느꼈다. 오히려, 흔들리는 지하철을 타고 통근하는 시간 덕분에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출퇴근 독서하기를 8년. 나는 업무 이외에도 독서 인플루언서로도 활약하게 되었고, 인터넷 매체에 가끔 칼럼을 쓰게 되었다. 퇴직 전 꼭 내 책을 내겠다는 꿈도 꾸고 있다. 안정이라 믿었던 삶에 빠져 있었다면 불러오지 못했을 변화였다. 예측 불허의 인생의 길에서 항상 도사리고 있는 변화는 위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 집 아이들도 가끔 변화를 두려워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럴 때마다 당당히 맞서라고 조언해 준다. 변화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맞이하고, 부스러기로 떨어지는 기회를 부여잡으라고. 변화의 파도에 맞서지 않고, 이를 잘 올라타면 둘도 없는 기회가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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