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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배웁니다 Feb 14. 2018

글도 결국 말과 마찬가지다

내 의도와 상대방이 받아들이는 뜻이 다르다

내가 누군가와 대화를 했을 때 상대방이 얼마나 내 대화를 이해했을 거라 생각하는가?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전체 대화의 약 60%정도만이해를 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경악스러울 정도로 낮은 수치긴 하다. 또 한편으로 의사소통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실감하게 만들어주는 수치이기도 하다.


인간은 다양한 형태로 의사를 전달한다. 바로 누군가 내 옆에 있으면 말이나 몸짓, 아니면 눈길로도 의사를 전달한다. 만약 온라인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문자 메시지, 좀 더 진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면 메일을 쓰거나 블로그 등에 글을 올리기도 한다.


이토록 다양한 형태로 인간은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으며, 통상적으로 우리는 대화보다는 글이 자신의 의사를 좀 더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화뿐만이 아니고 글쓰기에서도 ‘이해’의 부재는 일어난다.


나는 종종 브런치를 통해서 글을 올리곤 하는데 분명 a라는 의도로 글을 올렸지만 상대방은 a를 설명하기 위해 쓴 b라는 양념에 더 주목하는 등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조금 다르게 글을 받아들이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처음엔 그 글이 ‘실패한 글’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a라는 의도로 상대방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려고 했는데 상대방이 a-1이나 a-2, 심지어는 b나 가, 나, 다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내 글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 만물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태도가 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갈 때, 우리는 같은 소리, 영상, 장면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부의 필터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해석의 경로를 거쳐 최대한 주관적인 기억으로 오감으로 받아들인 ‘사실’ 을 저장하고 있질 않은가.


나 또한 그런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때 내 글이 어떻게 읽히든 크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읽히든 저렇게 읽히든 어떤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울림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괜히 젠체하며 선민의식에 둘러 쌓여 굳이 내 의도대로 상대방을 이끌고 가고 싶지는 않다. 아니 어쩌면 나의 글과 독자의 이해 사이의 간극 때문에 좀 더 신선한 생각,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해로의 여정은 참 고단한 길이다.


하지만 아무렴 어때. 우리는 다가가고자 하는 그 열정과 의지만 잘 간직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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