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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배웁니다 Sep 29. 2017

산다는 것

바지춤의 사이즈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마른 나’는 없다. 거의 평생에 걸쳐 마른 몸을 유지해왔던, 왜 남들은 살이 찌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이제 없다. 이제 하루라도 운동을 거르면 배에 살이 찌기 시작한다. 얼굴의 볼살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퇴근길에 일부러 걸어서 간다. 걷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다. 날이 이제 제법 쌀쌀해져서 걷기 좋은 날씨인데 앞으로 날씨가 추워진다면 이제 지금처럼은 걷지 못할 것만 같아 조금은 신경이 쓰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늘어나는 허리둘레만큼 지식의 깊이도 늘어났느냐, 혹은 세상 사람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그런 것들을 내 마음속에 갖게 되었느냐라고 묻는다면, 사실 그것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인생은 물음표의 연속이고, 때론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 마인드로 살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다. 


참 별거 없는 것 같은 인생인 것 같다가도 한편으론 살면서 깊은 생각 혹은 철학적 사유에 빠질 때마다 나 스스로의 선민의식에 빠져 나만이 인생을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어쭙잖은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세상에 나이만 차고 참 생각이 모자란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또 세상을 본인이 참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본인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의 의견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본인보다 한 차원 낮은 의견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는 게 종종 느껴진다. 왜 그런 생각이 타인으로부터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다 느낌이라는 게 있다. 내가 누군가를 하대한다면 그런 생각이 타인에게도 전달되는 법이고, 대등한 존재로 대한다면 상대방도 그러한 기운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되는 법이다. 사람은 의식의 영역으로만은 설명될 수 없는 많은 부분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평소의 마인드를 올곧게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상 늘 어딘가 뒤틀리고, 모순에 얽힌 본인의 모습을 상대방도 눈치챌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꼭 겸손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자랑’의 동물이다. 오늘 내가 오버워치에서 몇 킬을 했고, 우리 회사가 추석에 상여금을 얼마를 줬고, 우리 남친이 혹은 여친이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고 등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복’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남들에게 증명받는다는 것 자체로도 우월감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그게 전부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물론 별로 부질없는 행위라는 것을 다들 알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별로 대단할 것 없는 인생에 그거라도 안 하면 세상이라는 음식에 조미료 하나 없는 밍밍한 맛만 느끼면서 사는 기분일 것이다.


뭐 특별히 누구에게나 대단할 것 없는 인생이지만. 

그러한 ‘별 볼 일 없는’이라는 인생이라는 근거로써 우리는 어떠한 대단한 목표의 성취가 불과 며칠밖에 지속될 수 없는 행복이었음을 경험하고 또 타인의 목표의 성취 또한 그러하리란 것을 공감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인생은 참 하잘 것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차원을 달리 해서 본다면 꼭 그렇게 바라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지금 나의 예를 들자면 나는 소주에 토닉워터를 섞어 마시면서 적당히 취한 기분에 글을 쓰고 있다. 근데 지금 난? 행복하다. 적당히 들뜬 기분에 내가 생각나는 대로 적절히 리듬에 맞추어 글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내 글을 따라온 독자들도 아마 내 글의 리듬에 몸을 맡겨 편안하게 그리고 즐겁게 글을 읽어 내려갔을 것이다. 그냥 그런 것 아닐까. 소통하고 또 소통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인생. 살을 부비고 있든 아니면 저기 원거리에서 전기적 매체를 통해 통신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글을 통해 나 자신을 느끼고 또 나도 저기 먼 곳의 어디선가 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글을 쓰고.


결국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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