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엄마
모두에게 있지만 모두가 겪지는 않아요
반항과 분노와 원망을 꽝꽝 뭉치면,
네가 된다.
코로나 3년 거주지에 묶이면서
비틀린 사춘기 아이들이 많다.
거기에 지적 능력이 다소 부족하다면,
그 불확실하고 처치곤란한 갑작스러운 성향이란
참으로 버거운 지경에 도달하고 만다.
학교 선생도 보육원 선생도
심지어 병원 의사선생마저도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버리고마는
너를 내가 마주한다.
미국에 갈 거예요.
서울숲도 갈 거고요,
혼자서 어디든 마음대로 가고 싶어요.
내 안에 레오박사가 있어요...
너의 말을 기록하다가
혹시, 엄마 있어요?
혹시라는 단어에 내 목이 탁 걸린다.
보육원 아이들에게는 주로 엄마 부재가 당연하기에
네 질문은 당연하다만 나는 왜 그 단어가 이토록 아플까.
어, 있어 근데 선생님 엄마는 할머니야.
아, 그럼 뭐... 그래도 있기는 있네요.
할머니는 엄마 노릇을 못하는 듯이 이 정도 답변이 너를 위로할까 싶어서 얼른 엄마를 격하시킨다.
영문은 모르지만 절대로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너에게 나는 고작 손을 잡고 핸드크림을 발라준다.
말랑한 귤을 건네고, 예쁜 볼펜을 선물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차선책들을 건넨다.
혹시, 엄마가 없는 너에게 웃는다.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오히려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