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꽉 채운 토요일

by 다듬

본래 목적은 화장실이었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하였고, 산에 올라가면 공식적인 화장실이 없을 터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 편리한 편의점이 생겼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에너지음료를 구매하고 계산대에 올리며 화장실 여부를 물었다.

문득 우리와 눈맞춤을 한번 한 직원은 계산을 먼저 하라고 했다.

계산을 하지 않으면 화장실을 알려주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재차, 삼차 그녀는 선계산 후 알림을 말했다.

'계산을 안 하는 사람들이 있나 봐요' 녀석은 농같은 혼잣말도 대화도 아닌 말을 했다.

나는 얼른 카드를 내밀었다.

전방으로 한 50미터 차 타고 가란다.


아, 시골인심이라니...

돌아 나오는데 굳이 쫓아 나와 저어기 캠핑장 옆에 화장실이 있으니 거기를 이용하란다.

본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차에 올랐다.

인상이 좋지 못하다.

고약한 동네군.

시골마을 절반 이상 어르신들만이 계신 동네에서 편의점 매출이 얼마나 나오겠는가,

한 명의 고객도 놓치지 말라는 주인장의 엄명이 있었던 것이겠지.


벌초는 고된 작업이었다.

1년 만에 풀숲과 나무들은 길을 자취 없이 감추었고, 내 키로는 감히 진입조차 하지 못할 지경이다.

경북에 산들은 돌도 많고 모양도 삐죽거린다.

제초기를 들고 무사처럼 휘두르는 녀석이 일하는 동안,

나는 3천 원짜리 낫을 들고 풀이 과연 베어 지는가를 시도하고, 뿌리를 어디까지 파면 파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을 뿐이다.


조상들에게 덕을 볼 생각도 없으며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화를 내릴 것이라는 믿음 역시 없다.

다만, 살아서 그들에게 어떤 기림을 하고 싶어 하시는 시어머니를 위한 행사일 따름이다.

풀을 베고 나무들을 톱으로 썰어내는 비장한 작업들이 이어졌다.

더운 날이었다. 얼음물 한 통이 금방 동이 났고, 쉬 배가 고파왔다.


녀석의 할머니 묘소는 문중 사람 아무개 씨의 너른 콩밭이 바로 내다보이는 곳에 홀로 위치하고 있었다.

묘 위에 삐죽 튀어나온 풀들을 베다가 나는 뒤로 벌렁 넘어졌다.

대충 볼 때는 몰랐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없이 많은 벌레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내 손길과 눈길이 닿을 때는 교묘하게 흙처럼, 풀처럼 은닉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내가 쉬는 사이 그들은 물줄기들처럼 분주하게 제갈길을 갔다.

인간의 비명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초록과 흙빛을 지닌 미안하게도 무명 벌레들이 어디선가 기어 나오고 또 어딘가로 기어들어갔다.


볕 좋은 땅에 누운 죽은 자의 공간은 수많은 생명들의 보금자리가 되는구나.

벌초 와서 뭔가 숙연한 감동을 느껴본 건 난생처음이다.


경북 산세는 멀리서 보면 장엄하고 멋지다.

가로수로 늘어선 감나무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편의점의 안달함에 어이없던 마음도 사라진다.

봄에 다시 오자고 또 다짐을 하며 집으로 향한다.

고속도로는 수없이 많이 몰려든 차들로 빡빡하고 해 내리는 빛에 까무룩 졸기 시작한다.


보람찬 토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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