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지영 Jul 10. 2020

마음속 옷장에 넣어 둔 미움


감정 식탁/ 미움

계절이 바뀌면 옷장을 정리한다. 낡은 옷이나 안 입는 옷들은 정리한다. 20년째 버리지 못하는 옷이 있다. 칠흑 같은 까만 검정 넥타이, 검정 양복이다. 문상 갈 일이 종종 생기니 먼지를 털고 다시 옷장에 넣는다. 장례식장 갈 일이 아니면 꺼내 입지 않는 검정 양복과 검정 넥타이처럼 특정한 시간에 꺼내야 할 감정이 있다. 이런 감정을 대면할 때 쓴 한약을 먹는 것처럼 쓰다.


순수하고 이상적인 시절 있었다. 결혼은 남자, 여자에 사랑에 완성이고 순수한 결정체라고 믿었다. 영화 속 따듯하고 안정적인 결혼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한 결혼이어서 시댁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시부모님들이 딸처럼 대해 주시고 예뻐해 주셨기에 시댁하고 함께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내 믿음은 결혼식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깨졌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시어머님께서 부르셨다. 그리고 본인 종교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함께 종교생활을 할 것을 요구하셨다. 한 가정에 두 개에 종교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신앙에 대해 어머님께 말씀드리고 함께 할 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 딸처럼 생각하신다고 믿었기에 이해해 주실 꺼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착각이었다. 어디다가 말대답하냐고 어머님은 화를 내시면서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셨다. 시집을 왔으면 무조건 남편 집안의 문화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 의견을 이야기한 것이 말대답이 되고, 결혼하면 남자에 문화에 존속되어야 하다니 머릿속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딸처럼 대해 주셨던 어머님은 자신의 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에게 서운하셨는지 무서운 사감 선생님이 되셨다. 시집살이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려고 하시는지 엄격한 모습으로 시 월드에 위엄을 보여 주셨다. 시댁에는 제사, 명절, 집안 대소사가 많았다. 어린 나이에 집안일이라는 건 설거지, 빨래 정도만 엄마를 도왔을 뿐인데 해 본 적 없는 나는 실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어머님은 타박하셨다.



시어머님 갈등 속에서 남편은 이웃나라 왕자님이었다. 그저 관객처럼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런 상황들이 지속되면서 나의 결혼은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를 지켜 줄 왕자도 없고, 딸이 될 수 없는 시댁에서 결혼을 포기하고 싶었다.

 

마음이 몸으로 전달되었는지 위경련, 고열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수개월 동안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던 의사 선생님께서 남편에게 입원을 권유하셨다. 입원해서 안정을 취하고 친정어머님과 함께 보내게 하라는 것이 의사 선생님 처방이셨다. 엄마에게 입원 소식을 알렸다. 어머니께서는 먹고 싶은 게 없느냐고 물으셨다. 백 새우젓 넣은 계란찜을 먹고 싶다고 했다. 전화기 너머에 엄마의 슬픔이 느껴졌다. 미안한 마음에 나도 목이 멨다. 엄마 목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위통이 줄어든 것 같았다.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엄마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에서 깬 나를 보면서 진작 전화했어야 했다고 하셨다. 엄마가 곁에 있다는 것에 나는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소리 내어서 펑펑 한참 울었다. 입이 바짝 말라서 치아에 입술이 붙었다.

마른 입술에 따듯한 수건을 대어 주시면서

"다 울었으면 밥 먹어. 계란찜이랑 콩나물 국 끓여 왔다.”

식탁을 차려 주셨다. 마른입 안에 들어간 계란찜은 새우젓 간을 해서 그런지 단 맛이 나는 짠맛이었다. 도저히 못 먹을 것 같았는데 차려 주신 음식을 다 비웠다.

갓난아기 트림시키듯 내 등을 쓸어주셨다. 엄마 손이 약인 것 같았다. 위통이 사라졌다. 밥을 먹어서 그런지 말할 기운이 생겼다. 엄마에게 혼나도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그동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엄마에 반응은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하셨다. 결혼은 다 그런 거라고 어른에 길을 내가 빨리 선택했을 뿐 누구나 겪는 통증이라고 하셨다. 어차피 시작한 어른 수업이니까 피하지 말고 당당하게 이겨내라고 하셨다. 엄마와 이야기하면서 체한 것처럼 답답한 것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입원하는 2박 3일은 나에게 연수원에 들어간 연수생 같았다. 결혼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엄마에 여자로서 조언이 가슴속에 새겨졌다. 큰 병이 아닌데 입원 처방을 내린 의사 선생님은 마음 병이라고 생각하셨던 같다.


덕분에 마음에 찬 기운이 사라지고 몸이 나아졌다. 엄마에 조언처럼 겪어야 할 일이라면 잘 겪어 내고 싶었다. 상처가 생기더라도 결국 정복해야 할 등반처럼 나는 몇 개에 히말라야를 정복했고 상처투성인 인생 산악인이 되어 갔다.

시어머님은 10년 전에 암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시고 시아버님만 살아 계신다. 이제 시댁은 왕국이 아니다. 절대 권력자도 없다. 그저 왕국에 옛터만 남아 있듯이 기억 속에만 있다.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집안 흩어진 제국이 되었다.



비가 오면 온 몸이 쑤시듯 명절이나 가족들이 모이는 절기가 되면 가슴이 저리다. 마음속 옷장에서 담아 둔 감정이 절기마다 꺼내진다. 불타오르는 미움은 아니지만 미움이 피어오른다. 빛바랜 기억 속에 있는 상처가 떠오른다.




추천 레시피


음식 재료 중 가장 엄마와 같은 것은 계란이다.  평범한 재료이지만 가장 귀한 재료이기도 하다.

아플 때 엄마의 맛을 가진 계란이 생각난다. 계란은 마음을 달래 준다.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맛. 편안한 목 넘김으로 고소하고, 소화가 잘 되어서 든든하다. 다시 힘이 나고 엄마의 품 같은 맛이다. 차가운 가슴을 데워 주고 지친 영혼을 품어줄 식 재료 계란을 이용하는 요리를 추천한다.


 인생의 산악인들이여! 힘내시길……




프렌치 오믈렛

Omelette  française


계란찜 같은 요리를 찾다가 프랑스 북부 로렌 지방의 키슈(Quiche)라는 디저트를 알게 되었다.

디저트를 메인 요리로 변형시키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디저트인 키슈는 타르트 도우에 양념한 계란 물을 붓는다.  나는 이 도우 타르트를 감자로 대체했다. 그런데 감자가 가지고 있는 전분 때문에 자꾸만 계란 넣은 감자 전이되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공시키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졌다. 나는 감자를 강판에 매일 갈았다. 그 덕에 팔목은 두꺼워지고 근육이 생겼다. 가족들은 실패한 오믈렛을 매일 먹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계속했다.  전분을 얼마나 빼야 하고, 온도는 얼마를 유지해야 하는지 알아내고자 매일 오믈렛을 구웠다.



계란 백 판의 실패를 딛고 알아낸 레시피를 소개한다.


8시간 동안 간 감자를 물에 담그고 완전히 녹말 제거한다. 그리고 물기를 뺀 간 감자를

고슬고슬하게 기름에 볶는다. 볶은 감자 채가 엉기지 않게 잘 식혀서 냉장고에서 하루 동안 차갑게 만든다.  이렇게 만든 감자 도우에 그 위에 그뤼에르 치즈를 갈아 얹고, 양파, 버섯을 올리고 우유, 육수, 계란을 풀어서 양념한 계란 물을 위에 붓는다. 그리고 오븐에서 90분 정도 굽는다. 노란색이 약간 갈 색 빛이 돌 때까지 지켜보고 계란 물이 익어 부풀어 오르면 포일을 덮고 시간을 채워 익힌다.  익은 오믈렛은 종이 포일을 덮고, 젖은 리넨 행주를 덮어 촉촉함을 유지하면서 찬 바람에 식힌다. 식는 동안 단단해지고 다시 데웠을 때도 모양이 그대로 유지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오믈렛은 나이프로 우아하게 썰어지는 메인 요리로 탄생된다. 메인 요리에 소스가 곁들이 것이 프랑스 요리의 스타일이어서 고소한 크림소스를 더했다. 함께 먹으면 촉촉하고, 고소함이 증폭된다.  접시에 소스를 붓고 그 위에 오믈렛을 올리고 후추나 허브를 토핑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