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작가 놀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작가 Dec 31. 2019

시대 속에, 우리

<시대의 소음> / 줄리언 반스

운명. 그것은 전혀 손쓸  없는 어떤 일에 대해 쓰는 거창한 단어일 뿐이었다. 삶이 당신에게 “그래서라고 말했을 ,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운명이라 불렀다.

‘1932 당이 독립 조직들을 해산하고 모든 문화적 문제를 맡게 되면서,  결과로 오만과 편협, 무지가 완화되기보다는 체계적으로 집중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리고 노동자를 채탄 막장에서 데려와 교향곡 작곡자로 바꾼다는 계획이 정확히 실행되지는 않았다 해도,  반대에 해당되는 일이 벌어졌다. 작곡가는 탄광 광부처럼 생산량을 늘려야만 했고, 그의 음악은 광부의 석탄이 몸을 덥혀주듯이 마음을 덥혀주어야 했다. 관료들은 다른 범주의 생산량을 평가하듯 음악 생산량을 평가했다. 정해진 규범들이 있고,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이 있었다.’

‘...반박할  있는 순간적 판단이 아니라, 최고위층으로부터 내려온 정책 강령이었다. 다시 말해서 성서나 마찬가지였다. 드리트리 드미트리예비치에게 허용된 유일한 행동 방침은 공개 사죄를 하고, 과오를 취소하고,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어리석은 젊음을 주체   나머지 잘못된 길로 들어섰노라고 해명하는 것이었다.  외에도 진실하고 대중적이며, 듣기 좋은 음악으로 방향을 바꿀  있도록 즉각 소련의 민속음악에 몰두하겠다는 뜻을 밝혀야 한다. 케르젠체프에 따르면, 그가 결국 호의를 되찾을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인간 영혼이 아니라면, 예술가가 무엇으로 일을 하겠는가? 예술가가 단순히 장식이나 부자와 권력자들이 애완견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자신부터가 감정, 정치, 예술의 원칙에서 항상 반 귀족적이었다. 그런 낙관적인 시대에-정말로 불과   전이었다-인류까지는 아니라도  나라의 미래가 다시 만들어지고 있던 시절에는, 모든 예술이 마침내 하나의 영광스러운 공동 프로젝트로 합쳐질 것처럼 보였다. 음악과 문학과 연극과 영화와 건축과 발레와 사진은 사회를 반영하거나 비판하거나 풍자할  아니라 사회를 만드는, 역동적인 동반자 관계를 이룰 것이다. 예술가들은 어떤 정치적 지시도 없이 오직 그들의 자유의지로 동료 인간들의 정신이 개발되고 꽃 피우도록 도울 것이다.’

‘...권력층이 말을 갖게 하라. 말이 음악을 더럽힐 수는 없으니까. 음악은 말로부터 도망간다. 그것이 음악의 목적이며, 음악의 장엄함이다.’

‘...고향에서는 벨로모리를 피우는 남자들에게 감시를 받았다면, 여기 미국에서는 언론의 감시를 받았다.’

‘...정말로, 그는 러시안인이 된다는 것은 비관주의적이 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러시아인은 아무리 박박 문질러 닦아도 언제나 러시아인이라고 적었다. 카를로-마를로와  후예들은 죽어도 이해하지 못했던 점이었다. 그들은 인간 영혼의 기술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결점은 있다 해도 기계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히 뜯어고치는  아니라 박박 닦는 정도밖에는  수가 없었다. 닦고, 닦고,  닦아보라.  모든 낡은 러시아적인 것들을   씻어내고 반짝반짝 새로운 소비에트적인 것을  위에 칠해보라.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칠하자마자 페인트가 벗겨지기 시작할 테니까.’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 ... 그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작곡을 했고, 누구를 위해서도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출신과 무관하게 자신이 만든 음악을 가장  즐겨주는 이들을 위해서 작곡을 했다. 들을  있는 귀들을 위해 작곡을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의 참된 정의는 편재하는 것이며, 예술의 거짓된 정의는 어느  특정 기능에 부여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스탈린은 숭고한 것이면 뭐든지  좋아했고, 바로  때문에 베토벤을 좋아했다.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들었을  그는 귀로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음악-우리 존재의 음악-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그가 고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자존심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표현에 불과했으나 정확한 표현이었다. 권력층의 압력을 받다 보면 자아는 금이 가고 쪼개진다. 남들 앞에서 겁쟁이는 마음속으로는 영웅으로 살아간다. 혹은  반대이거나. 아니면,  흔한 경우는 남들 앞에서 겁쟁이는 마음속으로도 겁쟁이로 산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사람의 생각은 도끼날에 반으로 쪼개진다. 차라리 산산이 쪼개져서 조각들이-그가-한때는  들어맞았음을 헛되이 기억하려 애쓰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역시 어려웠다.
러시아 역사에 대해 내가  알지 못한 탓도 있고,

번역체를 좋아하지 않는 개인적인 취향 탓도 있다.
작가의 실제 문체가 어떨지는 내가 러시아어를 공부하더라도 알기 힘들 테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나치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와는  다르다.

왠지 차갑다, 그네들이 사는 지역의 날씨가 느껴지는 .


추워 고립되는 일이 많아 그런가, 인생에 대한 고찰이 

 차가움에서 상상되는 것과 달리 깊고 넓다는 생각은 드는데
어쨌든 아직 나에게는 그들의 세계가 낯설다.

아무튼.
 마지막 옮긴이의 ,

 시대를 살지 않은 사람이 시대에 올라  살아남은 누군가를 비판할 수는 없다는  동의한다.
단순히 삶을 ‘연명’ 하기 위한 선택들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자신이 창작해  무언가를 시대의 소음과 무관하게 남기는 ,

 재능이 빛날 수밖에 없을 만큼이었기에 

주변까지도 위협이 전해지는 시대에  주변을 지키는  등을 해내는 싸움을 

지금 우리는, 나는 감히 상상할  없으리라.

조금  깊이 알아보고 싶어 졌다.
슬프고 답답해질 테지만은.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워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