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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Road Movie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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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Dec 06. 2022

우연이 주는 행복

2008. 방콕

 태국의 역사 같은 걸 너무 모르고 가는 것 같아 위만멕 궁전에서 가이드 투어를 한 날. 나는 어릴 때 고궁을 찾았을 때처럼 지루하지 않고 나에게 낯선 그네들의 역사를 알아가는 게 재밌다고 느껴지는 자신이 신기했다. 끝나고 시계를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나는 원래 역사와 관련된 곳을 하나 더 가려던 마음을 바꿔 곧장 카오산으로 향했다. 이 여행에서는 예산을 제외한 어떤 것도 일정 따위에 얽매이거나 시간에 쫓기듯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처음 시작한 배낭여행에서 이 여유와 자유에 너무 쉽게 익숙해져서 나는 되려 겁이 났다. 그럴 수 없는 일상을 혹여 힘들어할까 봐. 아직 일상과 여행의 발란스를 맞추는 연습이 되지 않았던 나는 자꾸만 비교되는 자유와 일상 사이에 대한 책임감이 이렇듯 문득, 무겁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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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에 있는 국숫집에서 아침을 먹고 나는 곧장 방람푸 선착장으로 향했다. 배낭여행을 처음 떠났던 이때 나는 막연히 언젠가 꼭 인도에 가고 싶다는 꿈이 있었고, 제대로 끓인 짜이 라테 한 잔만 먹고 싶다는 생각으로 인도인 거리에 가려던 거였다. 달리는 배 위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는데, 한 한국 여자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호주에서 결혼해 살고 있다는 언니는 한국에 방문하러 가는 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태국이 궁금해서, 방콕을 경유하는 비행기를 끊고 3일간 스탑 오버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언니는 처음 보는 내게 부탁이 있다며, 아무런 계획이 없이 와서 그러니 이 날 내 일정에 자신도 함께하면 안 되겠냐 물었다. 사실 계획이랄 것 없이 그날그날 원하는 목적지에 가서 발길 닿는 대로 다녔던 터라 언니의 시간을 나 때문에 낭비하게 될까 봐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언니는 어차피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괜찮다며 따라만 다닐 테니 괜찮으면 함께하자고 했다. 



 대화를 해보니 언니는 결혼 전, 그리고 결혼한 지금까지도 여행을 정말 많이 다니는 그야말로 여행 고수인 듯했다. 예컨대 인도인 거리에 짜이 한 잔이 먹고 싶어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인도에 3개월간 산 적이 있으니 자기가 주문을 도와주겠다며 순식간에 나를 이끌어 주었다. 그렇게 내가 생각해 둔 가게에 들어가자 언니는 짜이뿐 아니라 사모사를 비롯해 주전부리로 먹기 좋은 음식 몇 가지를 주문해 주면서 음식에 대한 설명까지 해주었다. 이 날이 방콕에서 제대로 된 첫날이었던 언니는 이것 외에도 걷다가 보이는 수많은 길거리 음식들에 호기심을 보이며 지갑을 열었고 내게도 꼭 반씩 나눠 주었다. 아끼기 바쁜 배낭여행자인 내가 선뜻 뭔가 사지 못하는 걸 보며, 자기도 그런 여행을 했었지만 지금은 조금 여유가 있기 때문에 사주는 것이니 편하게 받으라 말해주면서. 


 혹시라도 낯선 언니와의 시간이 불편할까 봐 고민했던 것은 찰나였고, 나는 우연히 생긴 언니와의 하루가 점점 마음에 들었다. 뭔가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어서 좋았던 게 아니라, 내 방식을 존중해 주면서도 자기 방식대로 여행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서 내게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었던 거다. 


 얼마나 편했으면 우리는 이 날 함께 장장 9시간을 걸었다. 저녁은 늘 그랬듯 카오산 노점에서 골라 먹고 싶다 했더니, 길거리 음식이 체질에 맞는 것까지 비슷한 언니와 나는 저녁까지 같이 먹게 되었다. 함께 먹은 음식은 다행히 맛도 훌륭했고, 바로 근처에서 언니가 궁금했다던 어묵 튀김까지 발견해 먹은 뒤 우리는 기분 좋게 서로의 연락처를 나누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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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한국에서나 다시 보겠지 생각했던 언니와는, 이틀 뒤 칸차나부리에 다녀와 주린 배를 부여잡고 급하게 저녁을 먹은 뒤 후식으로 용과 셰이크를 먹으며 걷다가 우연히 만났다. 이번에도 언니가 먼저 어디 들어가 수다나 떨자고 제안해 우리는 함께 한 바에 들어갔다. 단 이틀 보았을 뿐이지만 나는 언니에게 꽤 깊은 친밀감을 느꼈다. 상황은 나와 전혀 다르지만, 타고난 기질이 비슷하달까. 하지만 내게는 없는 당당함과 자존감이 보여 나는 언니가 참 좋았다. 이 날도 우리는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지면서, 다음 날 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기를 약속하고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언니는 이틀 전  내가 이야기하던 중 먹고 싶다고 했던 과일을 찾았다며 나를 과일 가게에 데려가 사주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쉬운 마지막 밤이, 예상하지 못했던 따뜻한 마음 덕분에 더욱 아쉽게 기울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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