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방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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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곱 시. 이 날 나는 왕궁 주변을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던 터라 조금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 먹으러 나가려는데 미리 부탁해 두었던 팬 룸이 나왔다는 직원의 말에, 내 기준에서는 값비싼 에어컨 더블룸에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곧장 방을 옮겼다.
짐을 던져두고 부랴부랴 나와서 나는 길거리 음식들 사이 남떠후와 빠떵코, 즉 태국식 도넛과 두유를 찾아 헤맸다. 두꺼운 안경을 쓴 현지인 아저씨가 도와준 덕분에 금세 갓 튀겨진 빠떵코와 따뜻한 남떠후를 먹을 수 있었는데, 고소하고 밋밋한 맛을 좋아하는 내게 두 조합은 정말이지 기대 이상이었다.
배도 채웠겠다, 나는 허허벌판 같아 보이는 싸남루앙 공원을 가로질러 탐마삿 대학교로 갔다. 대학교 구경은 내가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꼭 넣는 일정 중 하나다. 이 나라 학생들은 이런 공간, 이런 느낌 속에서 공부를 하고 꿈을 꾸는구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재미랄까. 학교는 생각보다 작았는데, 한국의 여느 대학교와 다른 분위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흥미로웠다.
기분 좋게 학교를 떠나 본격적으로 왕궁 구경을 시작하기 위해 왓포로 향하던 중, 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말았다. 왕궁 가는 길에 '여긴 어디지' 하며 슬쩍 보고 지나가려던 나를 붙잡아 친절한 말투로 설명을 하는 사기꾼에게, 나는 책에서 읽었던 일 그대로 당한 거다. 아마 내 인생 최초의 사기 경험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그의 친절한 표정과 말투에 마음을 열어 그가 하는 말을 믿고 계획에도 없던 뚝뚝을 타버렸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뚝뚝을 타기 전까지 웃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뚝뚝을 타자마자 왠지 등골이 싸한 기분이 들었던 거다. 나는 바로 가이드 북을 꺼내 용케 내 기억 속에 있던 그 페이지를 찾아 읽었고, 내가 딱 책 속에 등장하는 부류의 사기꾼에 걸려들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들이 나를 데리고 간 첫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원래 있던 자리로 지금 데려가 주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지금 생각해 보니 겁도 없이 센 척을 한 게 아찔하다. 아무튼 되지도 않는 영어들 중 떠오르는 나쁜 말들은 다 갖다 붙여 역정을 내는 내 목소리를 그들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는지, 뚝뚝 기사는 결국 나를 왓포 근처로 데려다주었다. 처음에 주기로 했던 30밧을 뚝뚝 뒷자리에 올려두고 나는 씩씩대며 뒤돌아 왓포로 걸어 들어갔다.
부처의 날이기 때문에 오늘 모든 왕궁은 열지 않는다던 사기꾼의 말과 달리 왓포, 왕궁, 왓 프라께 우 등은 활짝 열려 있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 사이에서 슬쩍슬쩍 옛 선조들의 자부심과 질서 따위를 느끼긴 했지만, 걷는 사이 한 번씩 나는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불쑥불쑥 치밀었다. 이래서 사기당한 사람들이 발 뻗고 못 잔다는 소리를 하는구나 싶었다. 계획에 없던 돈을 쓴 건 고작 30밧 정도였지만 그 사람의 친절한 표정과 말들이 생각날 때마다 억울하고, 쓸데없이 시간을 버린 게 화가 났다.
나는 결국 극심한 갈증에 못 이겨 걷기를 멈추고 잠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 그야말로 두 어시간을 정신없이 잤다. 일어나서 생각해 보니 점심도 거르고 대여섯 시간을 걸었다. 일어나자 몰려드는 허기에 나는 부스스한 얼굴 그대로 바로 옆 카오산 거리로 나갔다. 고민하는 시간도 아까워 내 눈에 처음 띈 죽을 사 먹었고, 익숙하지 않은 재료들이 잔뜩 들어간 죽을 나는 바로 옆 인도에 걸터앉아 한 점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다. 하루의 반 이상을 보낸 분노 속에서 그제야 좀 해방된 기분이었다. 힘이 좀 생긴 나는 바로 뒤에 있던 편의점에서 행사 중이던 싸구려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물고 라마 8세 다리를 향해 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지도 보는 데 젬병인데, 신기하게도 태국 여행 내내 헤매더라도 목적지에 어떻게든 닿았다. 그렇게 며칠을 걷다 보니 지도를 보고 목적지만 향해 걸을 때보다, 헤매듯 걸을 때 훨씬 다양한 것들을 보게 된다는 걸 알았다. 이 날 밤에도 나는 헤매다 우연히 이름 모를 축제까지 구경했다. 이런저런 행사로 북적이는 짜오 프라칸 공원, 다리 밑에서 춤 연습에 한창인 사람들, 강바람을 맞으러 나온 젊은 부부와 아이 등을 보고 걸으니 마치 한강의 흔한 풍경을 보고 있는 듯해 걸을수록 방콕이라는 도시에 친근감이 생기는 듯했다.
시원한 강바람을 찾아 나온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앉아 있으니 어느새 분한 마음이 그었던 미간의 주름 대신 미소가 자리 잡혔다는 게 느껴졌다. 사람에게 상처받은 마음이 또한 사람 때문에 치유되는 그 기분을 여행하면서도 느끼다니. 여행은 삶의 축소판 같다는 말이 십일 남짓한 사이에 이미 절절히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