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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Road Movie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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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Jul 18. 2023

비바람 속에 색을 담다

2010.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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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세비야에서 리스본에 도착한 건 늦은 밤. 하루 종일 한 일이라고는 책 읽고, 기다리고, 이동한 게 전부였지만 긴장과 쪽잠의 여파가 밀려드는 듯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래도, 버스 창밖으로 스페인과 또 다른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금세 마음이 개었다. 생각보다 리스본은 말끔했다. 그리고 스페인에 비해 영어가 잘 통했다. 지도 한 장 없이 온 도시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나는 길거리에서 만난 낯선 이들의 도움에 기대어 예약해 둔 숙소에 무사히 체크인을 했다. 열쇠를 받아 들고 드디어 이틀 만에 나만의 공간에 들어갈 때의 감격이란! 저렴한 방을 예약해서인지 식당 바로 옆 방을 받은 터라 다음날 조식을 먹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소리에 깰 게 금세 상상되었지만, 나는 당장 급한 피로를 풀자며 서둘러 침대에 몸을 뉘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새벽부터 식당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에 나는 알람보다 먼저 깼다. 다시 잠이 들긴 글렀다는 생각에 나는 몸을 일으켜 부은 얼굴 그대로 눈곱만 떼고 방 문 바로 앞 식탁에 앉았는데, 호스텔에서 주는 조식은 내 기대보다 훌륭했다. 느긋하고 풍성한 아침이 너무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나는 천천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아침을 먹었다. 세비야에 가는 김에 리스본도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정하고 온 터라 리스본에서 갈 곳 등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던 나는 식사 후 랩탑부터 켰다. 그런데 일기예보를 보니 내가 머무는 내내 리스본 날씨는 흐림. 날씨가 이렇다면 아마도 걷다, 비 피하기를 반복할 것 같다는 생각에 첫날이었던 이 날은 일단 중심가로 가서 발이 닿는 대로 걸어보기로 했다. 



 반나절쯤 걸어보니 리스본 중심가는 지도 없이도 나 같은 길치가 돌아보기 쉬운 곳이었다. 시내 중심가를 생각보다 빨리 돌아본 나는 좀 더 멀리 가봐도 되겠다는 생각에 리스본에서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인 수도원과 나타 맛집을 찾아 벨렘지구로 갔다. 수도원부터 돌아보고 유명한 나타를 파는 카페에 앉아 여유 부리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강하게 내리기 시작한 비에 나는 카페부터 들렀다. 보슬비 이기는 했지만 몇 시간 동안 비를 맞고 걷다가 마시는 차 한 잔과 갓 구워진 나타는 정말이지 꿀맛 같았다. 적당히 달콤한 나타 두 개가 준 힘이 컸는지, 이후부터 나는 '내친김에 가보자'며 명소들 여럿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결국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속에, 아니 어쩌면 그래서 걸을 틈만 나면 걷게 된 덕분에 나는 시내 관광 명소로 관광 책자에 나올 법한 모든 곳을 가본 듯하다. 돌아보니 리스본은 그렇게 나를 걷게 만드는 도시였다. 너른 광장이든 골목이든, 언덕이든 강이든 한 구석도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라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전부 보고 싶었던 곳. 그래서 내게 리스본은 머무른 시간에 비해 떠오르는 장면들이 다양한 도시로 기억된다. 



 얄궂게도 일기 예보가 틀리지 않았던 탓에 리스본에 머무는 나흘간 나는 강한 바람에 맞서 추위 속에 걸어야 했는데, 이상하리만큼 매일매일이 만족스러웠다. 궂은 날씨 속에도 걷는 게 주인 배낭여행자에게 구름 낀 하늘과 잘 어울리는 리스본의 '색'은 그야말로 걸을 맛 나게 해 주었다. 한나절쯤 노랑, 빨강, 파랑 세 가지 색깔로 채워진 오비두스를 다녀옴으로써 부족한 색을 채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회색빛 하늘에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게 해주는 주황색 지붕들 사이를 걸었던 고요한 걸음들이 나는 참 좋았다.  


 바람이 덜해 머리카락이 눈앞을 가리는 일이 가장 적었던 마지막 날, 나는 드디어 포르투갈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피부색이 짙고 여행객에게 살가웠던 리스본 사람들. 덕분에 자주 멈춰 서서 꽤 많은 이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서인지 나는 고작 4일 머무른 도시와 정이 들어버렸다. 하지만 '다음'이 있을 테니까. 나는 언제부턴가 어느 곳을 여행하든 떠나며 다음을 기약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아마 다시는 못 올 것처럼 여행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부터였던 것 같다. 정이 많아 사람이건 도시건 물건이건 정을 쉽게 줘버리고 마는 내가 이별하는 법이랄까. 


 비바람 몰아치는 날씨 속에서도 내내 즐겁게 걷는 스스로를 보며,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즐거운 여정을 만드는 법을 배운듯했던 리스본에서의 걸음들. 돌이켜보니 여행 중 만난 그런 길들이 내게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삶을 살아내는 법을 훈련시켜 준 듯하다.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삶을 살고 싶은 나에게 여행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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