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작가 놀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작가 Jun 05. 2019

명료한 나만의 태도

<태도에 관하여> / 임경선 에세이

몇 살이 되었듯, 지금 있는 자리에서 더 나아지려고 노력할 수 있었으면 한다. 노력이라는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르겠지만 그 고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간단히 결론 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서둘러 결론을 내려는 대신 그 문제에 대해 충분히 시간을 들여 생각해볼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또한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잃는 것이 반드시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관계를 가급적이면 ‘관리’ 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인간관계를 제외하고는 부디 놔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브라질 출신의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가 트위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다 좋아한다고 하면 당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모두를 기쁘게 할 수는 없다.

‘사랑파’냐 ‘현실파’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나쁜 것은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떤 가치가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독립적인 의사 결정이 어색한 것은 여태 그 나이가 되도록 자기 가치관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알지 못해서 그렇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스스로의 욕망에 무지하다 보니 그 어느 것도 우선순위가 모호해질 수밖에. 자신의 우선순위를 알려면 평소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주변에 휘둘리다 보면 정작 내가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어떤 불행이 닥쳤을 때 저마다 그 고통을 초월하는 방식이 있다. 어떤 사람에겐 종교가, 어떤 사람에겐 가족의 사랑이, 어떤 사람에겐 마약이. 그렇다면 글을 쓰는 사람은? 바로 글을 쓰는 것으로 그 고통을 초월하려 한다.
사람의 몸만큼 정직한 건 없고 사람의 마음만큼 조작 가능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한 선택들에 만족한다. 모든 선택에는 나름의 이유가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 그때나 지금이나 인지도보다 호감도나 충성도라는 가치가 내게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품위’가 아니라 ‘고유한 색채’가 아닐까.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고유한 색채’가 있으면 쉽게 시장 변화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원치 않는 방향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방향을 내가 확장되고 노출되는 일에 나는 주저함을 느낀다. 어렸을 적 나답지 않은 모습을 오래도록 연출하고 살아야 했던 것에 대한 슬픈 개인적인 반작용일 수도 있다. 외국살이를 오래 해서 관점이 조금 이상적일 수도 있다. 혼자 ‘자기 세계’ 속에 함몰되어 사는 게 아닐까도 생각한다. 하지만.
책은 이제 사양산업이다. 책은 팔리지 않는다. 유명해야 팔린다. 일단 무조건 이름을 알려야 한다.
혹은. 한국에서 작가로 인정받으려면 정식으로 등단을 해야 한다. 등단을 하지 않으면 진짜 작가가 아니다.
방향이 어느 쪽이든, ‘세상은 원래 그래’ 같은 명제에 나는 어쩐지 반항하고 싶어 진다. 지금으로서는 그 반항과 저항의 방식이 기왕이면 창의적이고 지속적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건 그것대로 괜찮은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용당하지 말고 인간답게 살라고 하기 전에 자신의 일에서 기쁨을 찾고 성실할 수 있는 권리도 있는 것 아닐까. ‘하면 된다’, ‘최고가 되어라’식의 맹목적인 압박은 폭력적이고 ‘애써봤자 어차피 남 좋은 일’은 무기력해 보인다. 가급적 양극단은 피한다.

자신의 소신을 솔직하게 말한다는 것은 점점 어려운 일이 되어간다. 대다수의 의견과 일치한다면 안전하다고 간과하기에 딱히 자기 생각을 의심하진 않지만, 소수 의견을 가진 사람이면 마음 한편으로 ‘내 생각이 과연 맞는 생각일까’라는 자신에 대한 의심을 끊임없이 품는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도 가진다. 그런 번거로움과 불안함이 싫어지면, 소수 의견을 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양극화된 목소리의 사회가 되어간다.

또한 자존감은 ‘나를 사랑하자’ 같은 1차원적인 자기 암시나 구호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낫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것도 아니다. 자존감은 ‘나 자신을 아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나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좋은 점을 극대화하려는 선한 에너지가 앞으로 걸어간 만큼 나를 존중하도록 만들어준다. 다시 말해, 타고난 것이나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나 자신과의 관계에 자존감이 좌우된다.

...일관된 삶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무언가에 몰두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이 인생의 방황을 줄여주고 공허함을 최소화시킬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용기의 구현과 그를 위해 모든 책임을 다하는 것. 아무렴, 자유를 얻으려면 그 대가를 철저하게 치러야 한다.




그녀의 글에 너무 공감되어 자꾸 시야가 뿌예졌다.
왜 나는 공감되면 자꾸 눈물이 나는 거지.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외국을 전전하며 살았다는 짧은 이력에서,

그녀의 수많은 문장들과 생각이 왜 그토록 나와 닮았는지가 이해됐다.

그가 언급한 작가들 중 특히 무라카미 하루키가 많은 걸 보면서는 공감을 넘어 동질감까지 느꼈다.

남편이 선물로 받아 먼저 읽었으므로

나는 책을 읽다 말고 몇 번이나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 말미에
아직 나는 내 마음을 그녀처럼 표현하지 못하므로 겸손해야겠다며 장난스레 농을 쳤다.

얼마 전 아이와 남편의 안부를 묻는 아빠에게
다행히 무탈하고, 그러나 바쁜 두 남자랑 산다 했더니 아빠가 말씀하셨다.

지금은 네가 잘 도우며 마음을 닦는 시간이고
후에는 네가 그들보다 바쁘게 네 삶을 사는 때가 올 테니 잘 견디라고.

아빠는 어쩜 그 지난한 시간들 끝에 내 마음 한가운데 놓인 문장 하나를 정확히 읽어내셨을까.

포기가 아니라
내 때 혹은 내 삶을 ‘감히’ 규정지을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온,

아마도 내려놓음을.

남편 외에는
아니 어떤 것은 남편에게조차 하지 않았던
자질구레한 마음을 전부 아빠에게 들켜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눈으로
그런 삶을 앞서 간,
나와 많이 닮은 누군가에게

지금 내 현실에 어쩔 수 없이 끼어드는 쓸쓸함을 위로받은 기분이다.

인생이 갈수록 복잡하기에
명료한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 예전보다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아직 어설픈 것만 같은 내 ‘명료한’ 생각이
꽤 유용하다고 해준 것만 같아
고마웠던 시간.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명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