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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Sep 11. 2019

기억하라, 당신도 인간이라는 것을

<이것이 인간인가> / 프리모 레비

# 본문 중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과 정반대 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간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여행 중에 그리고 그 후에도, 끝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건져낸 것은 바로 이런 불편함, 구타, 추위, 갈증이었다.
살려는 의지나 의식적인 체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고, 우리는 평범한 인류의 표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랑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집, 자신의 습관, 옷, 다시 말해 말 그대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겨버린 사람을 상상해보라.
그는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잃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리하여 그의 삶과 죽음은 인간적인 친밀감 따위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아주 가볍게 결정될 것이다.
운이 아주 좋을 경우 그게 더 낫다는 순수한 유용성 판단 정도를 따를 수는 있으리라.'

'오늘은 맑은 날이다. 우리는 시력을 되찾은 맹인처럼 주위를 둘러본다. 서로의 얼굴을 본다.
한 번도 밝은 태양 아래에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은 웃기도 한다. 배만 고프지 않다면!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은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그리하여 겨우내 우리의 유일한 적이었던 추위가 가시자 우리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똑같은 오류를 범하며 "오늘 배만 고프지 않다면!"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배가 고프지 않기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수용소 자체가 배고픔이다. 우리 자신이 배고픔, 살아 있는 배고픔이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궁핍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뿐이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

'...노르망디와 러시아는 너무나 먼 반면 겨울은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배고픔과 절망감은 너무나 구체적이었고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진흙 창인 우리의 세상과 이제는 그 끝을 상상하기도 힘든 황량하고 정체된 우리의 시간 외에
다른 세상과 시간이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

'...수용소에서는 모든 일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벌어지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것은 쓸모없었다.
그것은 위험하기도 하다. 고통의 원천이자, 그 고통이 일정 한계를 넘으면 자연의 섭리에 의해 무뎌져 버리는 감수성이라는 것을
되살려내기 때문이다.'

# '독자들에게 답한다' 중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모든 반란은 어떤 식으로든 특권을 가진, 그러니까 신체 상태나 정신 상태가
다른 일반 포로들보다 훨씬 나은 포로들에 의해 계획되고 지휘되었다. 이건 놀랄 일이 아니다.
고통을 덜 받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건 처음에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수용소 밖에서도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투쟁을 선도하는 일은 드물다.
'거지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수용소는 유럽에서 파시즘이 강세를 떨치고 가장 기괴한 모습을 보일 때 가장 번성했다.
그러나 파시즘은 히틀러와 무솔리니 이전에도 존재했고, 분명한 형태로 혹은 가면을 쓰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수용소 체제를 향하게 가게 된다. 이것은 막기 힘든 과정이다.'

'...진짜 선각자와 가짜 선각자를 구별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모든 선각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주장을 일단 거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의 단순성과 눈부심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해도,
무상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실, 확인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실에 만족하는 게 훨씬 더 좋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아우슈비츠의 시간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글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냉소주의자로 치부되는 게 싫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지금 수용소를 떠올리면 격렬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짧았지만 비극적이었던 포로 생활의 경험이 길고 복잡한 증언 작가로서의 경험과 합산되어, 그 결과는 분명 긍정적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나의 과거는 나를 더욱 풍요롭고 자신감 넘치게 해 주었다.
새파랗게 젊은 시절 라벤스부르크 여자 수용소에 끌려갔던 내 친구는 수용소가 자신의 대학이었다고 말한다.
나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그런 사건을 경험하고 글을 쓰고 관조하면서 인간과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 작품 해설 중

'과거의 고난이나 먼 장소에서 일어난 비참한 사건에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들은 상상이 미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를 의식해야 한다.
그러한 공포를 잃어버리는 순간, 냉소주의가 개선가를 울릴 것이다. 우리들 '인간'을 태우고 표류하는 배가 난파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리모 레비가 우리들에게 남긴 경고이다.








이 책의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가 실제 겪은 일의 가혹함에,
그리고 그 일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읊어주는 그의 문체에.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레비는 두 종류로 나누었다.
떠올리기 싫어하는 사람,
그때의 경험을 통해 인간과 그에 관한 수많은 일들을 사유하는 사람.

그는 스스로 후자라고 했다.
그래서 글을 쓸 수 있었다고,

그 경험은 삶을 깊이 바라보고 깨닫게 해주었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또다시 그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고 싶었을 거다.

그리고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헛헛했다.
그가 자살한 이유는 그가 품고 가져갔으므로

후세인 우리는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경멸스러운 자들로 시끄러운 때에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우리가 화만 내고 있을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최악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도 매번 경신하는 것을
역사가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미래에 과거라 불릴 시간 안에 살고 있다.

사건만 떠올리거나,
단편적 인상만으로 역사를 보지 말자.

그 속에 주인공이었던 인간들이 곧 우리와 같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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