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전임신이 나아요, 난임이 나아요?
사실 내 임신에 '난임'이 첫번째 고비는 아니었다.
첫째 아이때 덜컥 '혼전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혼전임신을 했다고 하면 지인들이 이런 얘기를 해주셨다.
"어유, 요즘 아기갖기도 힘든데 축복이다!"
어떻게든 곱게 포장한 축하를 건네주는 분들께 감사하기도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나는 임신 내내 이 말을 떠올리며 혼전임신으로 인한 여러가지 고통을 스스로 상쇄해보려 노력했다.
부른 배로 종일 웨딩촬영을 할때도,
회사에 임신사실을 알리지 못한채 야근을 할때도,
자취방에서 쥐난 발을 주무르며 잠에 들때도,
입덧으로 토할때 등을 두드려줄 사람이 없어도,
한밤중에 시작된 가진통에 병원에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혼자 발을 동동거릴때도.
'아이를 기다리느라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텐데, 배부른 불만이다.'라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애초에 '어차피 결혼할 거니까!'라며 내가 스스로 선택한 참극을 책임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출산이 한달 남은 어느날, 새벽 출근을 앞두고 옷을 입다가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다리 부종때문에 임산부 스타킹조차 맞지 않았다. 살을 꾹 누르면 피부가 다시 올라오는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스타킹을 패대기치고 발목이 느슨한 임산부용 양말을 꺼내신었다. 주말부부였던지라 그나마 양말마저도 혼자 낑낑대야 신을 수 있었다.
겨우 옷을 입고 현관문을 열자 겨울바람이 휑하니 사타구니로 스며들었다. 찬기에 빡! 수축한 배를 붙잡고 종종종 걸어 차로 걸어갔다. 차에 타자마자 엉뜨를 켜놓고 패딩을 벗어 수축된 배에 둘둘 감았다.
무서운 마음에 남편에게 냅다 전화는 걸었지만, 잠이 덜깬 목소리를 들으니 배가 아프다는 이야기가 입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당장 내가 아프다고해도 남편이 해줄수 있는게 없었다. 여기까지 달려오는데 족히 4시간은 걸릴거였다.
지금 같으면 남편에게 전화는 커녕
"자궁수축에도 의연하게 잘 대처하는 만삭의 나 자신!"
하고 뿌듯해하면서 편의점에서 데운 두유 한잔 사서 원샷때리고 멋지게 출근할것 같은데,
그때는 호르몬의 농간때문인지 눈물보다 콧물이 더 뜨겁게 흐를만큼 울었다.
코로나 백신을 안맞았다고 사람 안태워주는 버스, 택시도 서럽고
만삭으로 벼락치기 운전연수를 하고 차없는 새벽에 겨우 출근하는 초보 신세도 처량했다.
친정을 떠나 타지에 자리를 잡은 직장인이라 더욱 서러웠던것 같다.
울음을 그치고 나서도 하루종일 말로 할수없는 떫음이 느껴졌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배부른 아내 덕분에 편도 4시간이 넘는 거리를 주말마다 왔다했다. 기상상황이 안좋거나 차가 밀리는 날에는 시간이 더 걸리기도 했다.
남편은 임신한 와이프와 조금 더 있어주기 위해 금요일 밤에 와서 일요일 밤에 다시 길을 나섰다. 한번쯤은 핑계를 댈 법도 한데, 열달간 단 한차례의 주말도 빼먹지 않았다.
언젠가 운전중에 코피가 터져 늦을것같다며 보낸 사진 속에는, 쌍코피를 턱까지 흘리며 좋다고 셀카를 찍고있는 초췌한 남자가 있었다.
나도 사고가 많은 한겨울에는 밤늦게까지 고속도로 CCTV화면을 틀어놓았다가, 남편이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나서야 잠들곤 했다.
이렇게 걱정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출산을 하고나니, 40주를 꽉채워 낳은 남자아이인데도 몸무게가 2.8kg밖에 되지 않았다.
고맙게도 일찍 찾아와준 혼전임신이었지만, 당시 나에게는 때이르고 떫은 열매였다.
내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고 사는 것일까?
애국하고 싶어서?
배우자에게 큰 선물을 주고싶어서?
사람이 원래 애를 낳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돼있어서?
아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걸 흔히 '희생'이라고 하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 희생의 길로 들어선다. 희생을 하지못해 슬픔에 빠진 가정도 한 둘이 아니다.
출산은 결국 나를 꼭 닮은 귀엽고 소중한 생명이 자라는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누리고 싶은 욕망인 것이다.
하지만 내 첫 임신과정은 그 욕망을 거의 채워주지 못했다.
흔히 임신! 하면 떠오르는 보양, 입덧, 임산부요가, 태교, 사랑스러운 아기용품 따위는 쳐다볼 여력이 없었다.
남편도 아기심장소리 한번 실제로 들어본적이 없다.
분양받은 보금자리는 이제야 첫 삽을 떴을 뿐이었다.
지금 사는 원룸에서 쫓겨나지 않고 아이를 키울수가 있나? 여기 옆방에 아기울음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릴까.
밤에 울면 어디로 데리고 나가야하지 하는 생각으로 대부분의 임신기간을 보냈다.
친정식구들은 나에게 실망해 눈물을 꽤 흘렸으며,
누가 뭐라 하지않아도 이미 심리적 죄인이 되어버린 남자친구를 가족에게 데려가 처음 소개시켰다.
상견례에 이어 혼인신고, 웨딩촬영, 간소한 가족 결혼식까지.
임산부에게는 백신을 놔주지 않던 때라, 나는 도서관, 카페, 마트 등 기분전환 할만한 어디도 출입이 안됐다.
뚜벅이 회사원인데 심지어 대중교통도 이용할수가 없었다.
급히 차를 뽑고, 운전연수를 받았다.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신차 옵션에서 내장재를 노랑색으로 선택해버렸다.
아직도 그 차를 타고있는데, 빛나는 노랑색 스티치를 볼때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하루하루 아찔했던 그때가 선명히 떠오른다.
물론 혼전임신도 경우에 따라 오히려 더 행복할수도 있다.
다만 나의 경우에는 장거리, 코로나 등의 패널티들이 겹쳐 더 힘들었다.
오히려 나는 난임치료준비를 하는동안 혼전임신때 사무쳤던 마음들을 치유받았다.
구태여 회사에서 멀리있는 산부인과를 찾아가지 않아도 되고, 어디가 아프거나 부족한지 부부 서로의 몸과 마음을 신경쓰고 보듬어줄 수 있다. 찾아올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준비할 시간도 충분하다.
우리는 정관 복원수술 후 자연임신 10여회 실패, 배란유도 1회 실패에 이어 시험관아기에 도전했다.
결국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간절함과 두려움을 서로 나눌수 있어 안심이 된다.
결국 임신에 실패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것지까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다보니 개인적으로는 모든것이 혼란하던 혼전임신때보다는 마음이 비교적 평온하다.
그렇다고 난임이 개나 소나 다 해볼만한 과정인가? 하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그렇지는 않다.
나 역시 아직 난임병원을 졸업하지 못한 햇병아리지만, 다음에는 혼전임신과는 또 다른 난임의 고통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