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실팍하다.

잠시 빌린 길 위에서

by 편린
『 표현 수집가의 말맛 노트』는 우리가 값진 표현들을 얻어 더욱 풍성하게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작하는 연재 노트입니다. 매주 월요일, 신선하고 다채로운 표현들을 하나씩 새겨보세요-!
1) (사전적) 사람이나 물건 따위가 보기에 매우 실하다.
2) (문학적) 마음과도 같은 것들이 매우 풍족하다.


때때로 혼잡하고, 때때로 한적한 거리를 걸을 때마다 내 시선은 늘 작은 발짓에 머물렀다. 그러고는 길 위에서 잠시 잠깐 스치는 아이들을 꽤나 오래도록 소곤소곤 뒤따르곤 했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길 위에서 나는 가끔씩 이곳이 원래는 작은 동물들의 세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둔탁하게 시린 공기가 시야를 흐리던 2018년 상해의 겨울, 늘어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위에서 한 아이를 만났다. 미지근한 버블티 같은 빛깔을 자랑하던 새끼 치즈 냥이. 매번 마주치면 기다렸다는 듯 쫄래쫄래 쫓아오던 그 아이의 이름을 나는 토리라고 지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 앙증맞은 매력을 품을 단어면 충분했기에. 토리는 타지 생활 속에서 한 움큼 자라난 내 외로움이라는 빈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잔망스레 내 양쪽 후드 티 끈을 툭 하고 잡아당기곤 했다. 일과의 끝마다 사랑스러움으로 한껏 무장한 토리의 매력에 허우적대던 나는 타오바오에서 한 움큼 사들인 끼니를 가방에 늘 챙겨 다니곤 했다. 늘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조금이나마 실팍해진 몸집으로 내 무릎 가에 기대어 앉아 차갑게 내려앉은 밤공기를 함께 들이마시곤 했던 아이. 겉보기에 토리를 돌보는 건 나였지만, 사실 난 늘 토리에게 형형할 수 없는 위로를 한 움큼씩 받아먹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후로, 언젠가 한 번은 집 주변 골목이 길냥이들로 가득하던 시절이 있었다. 걱정이 많아 잠을 못 이루던 어느 새벽 네 시였던가. 창문 틈으로 애처로운 아기의 울음소리가 스며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분명 동물의 소리 같기도 했는데, 그 안에 무언가 말하고픈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들렸다. 누군가에게 닿지 않을까 기대하며 어떠한 긴박한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한참의 고민 끝에 맨발로 나서 보니 가로등 불빛 아래 배가 고파 웅크린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엉엉 울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부랴부랴 끼니들을 안고 돌아와 건넸다. 그렇게 매일 새벽마다 나는 그 아이만의 비밀 친구가 되어, 그 아이가 조금씩 실팍하게 자라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돌이켜 보면 그때 그 아이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를 어쩌면 애처로이 위로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아이를 챙기며 차갑게 내려앉은 밤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작은 용기를 얻곤 했으니.


가끔씩 오해를 불러일으켜 원망을 사기도 하는 인간의 말들이 아닌, 오직 온기로만 내게 닿는 동물들과의 교감은 이렇게 언제나 나를 따스히 데운다. 우리는 늘 길 위의 동물들로부터 지친 일상 속 한줄기의 온기를 얻어내지만, 인간이 만든 세상은 꽤나 자주 그들에게 혹독하다. 본가인 춘천에서 운전을 하다 보면 도로 위에 차갑게 식어가는 고양이들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도로 위의 상황이 여유를 허락할 때면 종종 차를 세우고 조심스레 그런 아이들을 도로 옆으로 옮겨주곤 했다. 때로는 용맹하고 때로는 명랑했을 그 몸이 한밤의 매서운 바람보다도 너무나 차가워서 가끔씩 인간인 내가 너무 야속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춘천의 한 역사 안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채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버거운 몸짓으로 먹이를 구걸하는 비둘기를 만났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독 실팍하지 못한 몸집이 눈에 띄었다. 언제부턴가 비둘기의 터전을 전부 빼앗은 우리는 그들에게 더럽다는 색안경을 씌워 그들을 위험 속으로 내몰고 있다. 인간들이 만든 가짜 질서와 가짜 편의 속에서 그 호기로운 생명들이 무참히 스러져간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럴 때면 나는 그저 그 아이들이 건너가는 무지개다리 위는 부디 온전한 세상이길 꿈꾸거나, 단 하루치의 부실한 끼니를 제공하거나, 아이들이 무사히 길을 건널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는 일들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곁에 잠시나마 멈추어 섰다 출발하는 시간들이 점차 쌓여간다. 만약 세상이 작은 동물들의 것이라면 나는 잠시 빌린 아이들의 길 위에서 아주 잠시라도 조용한 눈짓으로나마 그들의 평온을 지켜주는 사람이고 싶다. 부디 한 때는 우리와 함께 이 땅의 주인이었던 아이들이 인간들에게 조금이나마 실팍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며.



연재 브런치 북 『 표현 수집가의 말맛 노트』에 등장하는 단어의 정의들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네이버 국어사전, 그 외 기타 문학 속 표현들을 참고하여 쓰고 있습니다.


https://brunch.co.kr/@pyeonrin/16

월요일 연재
이전 04화#03. 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