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근살짝 아롱다롱한 가을을 맞이해 볼까요?
『 표현 수집가의 말맛 노트』는 우리가 값진 표현들을 얻어 더욱 풍성하게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작하는 연재 노트입니다. 매주 월요일, 신선하고 다채로운 표현들을 하나씩 새겨보세요-!
1) 여러 가지 빛깔의 작은 점이나 줄 따위가 고르지 아니하고 촘촘하게 무늬를 이룬 모양
살갗에 스치는 바람이 한결 가벼워졌다. 유난히도 숨 막히던 올해의 여름이 조금씩 사위어가고, 그 자리에 슬며시 가을의 기운이 찾아들어 머뭇거리고 있다. 눈에 띌 정도는 아니어도 불어오는 바람에 약간의 찬기가 조금씩 섞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일들을 잔뜩 벌여두고 이뤄가느라 여름휴가를 놓쳤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영영 떠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에도 끝이 보이기 시작하니 문득 이 여름을 밋밋하게 떠나 보내버릴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30도를 웃도는 기온을 꿋꿋이 고집했던 한여름에도 어느새 정이 들었는지, 8월의 마지막 날에는 조금이라도 그 끝을 붙잡아 싶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멀리 여행을 떠날 만큼 여건이 허락되지는 않았기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해피해피 선배님께 조언을 구했다. 나와는 10살 이상 차이 나는 회사 선배님인데, 지금은 둘도 없는 벗처럼 친히 지내고 있다. 회사에 다닐 적에 제주도 한 달 살기 워킹 홀리데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볕 좋고 날 좋은 5월의 제주 바다에서 한껏 들뜬 채로 나풀거리며 반갑게 만났던 분. 어찌하면 이 세상을 명랑히 누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분명 여름휴가를 떠나지 못해 여름의 망령이 되기 일보 직전인 나를 이번에도 구원해 주실 것만 같았다.
"그냥 북한산 계곡 가서 발 담그고, 오미자차 한잔해!"
역시나 그분의 혜안이란. 빽빽한 건물 틈에서 도통 숨을 잘 쉬지 못하던 서울쥐에게는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이면 쉬이 찾을 수 있는 북한산이라는 선택지가 있었다. 오호라, 이거다! 그 길로 나는 요란스레 짝꿍을 꾀어내 우리만의 소박한 여름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세미 여름휴가는 다음과 같았다.
8월 31일 일요일. 여름휴가 일정.
은평구 한옥마을에서 평양냉면 한 그릇 뚝딱 - 북한산 중턱 사찰에 올라 마음의 평화를 찾고, 얼음 동동 띄운 오미자차 한 잔 들이켜기 - 한옥 카페에서 아이스 홍시 팥빙수 한 그릇 뚝딱하기 - 북한산 계곡 하류에 발을 담그고 서늘한 기운을 즐기다가 핑크빛 저녁노을 맞이하기
그날 하루만으로 그 어느 때보다 천진난만한 여름을 보냈다. 가을의 초입에서, 곳곳에 아롱다롱 피어오른 들꽃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토록 소박하고도 충만한 휴식이라니. 몸이 먼 곳에 가지 못해도, 마음이 지금 있는 곳에 충분히 머무를 수만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의 비결인 텐데. 어디 멀리 해외 휴양지로 떠나 호화롭게 여름을 보내고, 온갖 새로운 것들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사람들을 보며 잠시나마 침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내 곁에 머무는 것들로도 얼마든지 이런 햇살 같은 순간들을 채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코스모스, 구절초, 금송화, 억새, 단풍나무, 은행나무... 이 아이들이 모두 함께 아롱다롱 피어올라 올해의 가을을 짤막히 장식하는 일도 머지않았겠지. 그 틈을 타 귀한 가을을 즐기고, 또 한 번 차분하게 동면을 준비해야겠다. 뜨시고 찬 계절들이 한 번씩 거칠게 우리를 휩쓸고 달아나도, 언제나 본연의 자리를 단단히 지키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롱다롱 어울리며 평온할 수 있기를.
연재 브런치 북 『 표현 수집가의 말맛 노트』에 등장하는 단어의 정의들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네이버 국어사전, 그 외 기타 문학 속 표현들을 참고하여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