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이야기
유난히 뜨거웠던 24년 여름, 엄마와 나는 때마침 일정이 맞아 단둘이 꿈에 그리던 하와이 여행을 떠났다. 각자의 일로 늘 3인분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일주일 뿐이었다. 도보로 돌아다니기 좋은 와이키키 숙소 근처에만 머무르다가, 문득 하와이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이왕 오아후 섬 한 곳에만 머무르기로 한 거 이 섬의 진면목이라도 느끼고 가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통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ENFP 모녀는 즉흥적으로 우버를 타고 쥬라기 월드 배경지로 유명한 쿠알로아 랜치로 향했다. 그런데 천혜의 자연 안에서 황홀한 경치를 한껏 즐기고 난 뒤, 우리에게 급작스레 비극의 서막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즉흥 투어 후에는 예약해 둔 렌터카를 빌려 타고, 섬 한 바퀴를 전부 돌아볼 계획이었다. 나름 출국 전에 해외 운전면허증도 받아두고 신나게 하와이 드라이빙을 즐길 준비를 해두었는데, 예약했던 렌터카에 예상치도 못한 문제가 생겨버렸다. 게다가 이 큰 하와이 섬에서 우버로 10만 원을 넘게 내야지만 호텔까지도 겨우 도착할 수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까지 벌어졌다. 우리는 허허벌판에서 다급히 렌터카 업체들을 수소문하다가 결국 지쳐버렸고, 숙소로의 귀환을 결심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해변 서너 곳을 들렀다가, 잠시 수영을 즐기고 난 뒤, 새우 트럭에서 하와이안 갈릭 쉬림프 한 접시를 복스럽게 먹고 있을 시간이었는데… 하루 일정을 망쳤다는 생각에 침울했다.
그런데 웬걸. 절망적인 상황에서 잡아탄 우버 기사님이 날 때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만 살아온 토종 하와이 로컬이란다. 마주할 때부터 하하 호호 웃으며 젠틀하고도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시던 아저씨의 성미에서 우리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고, 엄마와 나는 확신의 눈짓을 주고받고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외쳤다.
“이 사람이다!”
"기사님. 혹시 오늘 하루 시간이 되신다면, 저희와 오아후 섬 한 바퀴를 돌아주실 수 있을까요?"
흔쾌한 미소와 상쾌한 외침으로 응답한 그는 친절하고도 활기차게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광활하고도 장엄한 하와이 로드 트립은 그렇게 운명처럼 들이닥쳤다. 우리는 하와이에서 나고 자란 아저씨의 알짜배기 힐링 루틴을 따라 오아후를 요란스럽게 쏘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내던 친구네 집을 방문한 것처럼 편하고도 신나게.
하와이 주민들이 주말마다 찾는다는 공원에 가 오아후 전경을 감상하고, 아저씨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애용하셨다는 새우 트럭을 찾아가 배불리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는 그의 원픽 세이브드 아이스를 먹고, 그의 단골 아사이베리 가게에 들러 거대한 아사이볼도 얻어먹었다. 그러고는 거북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라니카이 비치, 야트막하게 찰랑거리는 수심에서 스노클링하기에 최적이라는 샤크스 코브, 마치 꿈에서나 볼 듯 비현실적 압도감을 펼쳐 보이는 현지인들만의 바닷가까지… 온종일 다채로운 빛깔의 하와이를 즐겼다. 천군만마 같은 하와이 토박이 아저씨를 등에 업고.
밤에는 하와이 교도소에서 근무를 하시고, 낮에는 종종 시간이 날 때 우버 드라이빙을 하시는 아저씨께서는 은퇴 전까지 하와이에서 한평생 라이프가드를 해오셨다고 했다. 물론 훌륭한 서퍼이시기도 했고. 때마침 전설의 서퍼 타마요가 상어에 물려 안타깝게 운명해 애도의 물결이 일었던 시점이라, 자연스레 그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우버 기사 아저씨의 절친한 친구셨다 하여 그분들의 소중한 추억까지 엿들을 수 있었다. 하와이 해변 곳곳마다 그를 기리는 문구들이 사랑스러운 팻말로 달려 있곤 했는데, 나는 이런 식의 애도 방식이 참 좋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터부시하고 어려워하는 문화보다는 드러내놓고 다 같이 밝게 기리는 방식이라 더 따스했달까.
한창 수영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기였던지라, 어찌하면 이런 깊은 바다에서도 두려움에 떨지 않고 헤엄칠 수 있는지도 물었다. 막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유람선을 타고 한참을 나아간 바다 한가운데에서 거북이 투어를 하고는 그 깊이감에 약간 겁을 먹은 상태였기에 더더욱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하와이 라이프가드 아저씨만의 물살을 가르는 노하우가 말이다.
"바다의 심연을 사랑해야 해. 그 속에 빠지면 빠질수록 친해질 거야. 그렇게 친해지다 보면 어느새 두렵지 않게 돼. 나도 그랬으니, 너도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길을 잃은 여행객에게 길을 내어준 사람.
그날의 로드 트립에서 우리는 하와이 곳곳의 모습도 들춰볼 수 있었지만, 운 좋게도 그 문화적 면면까지 살필 수 있었다.
여행객은 차마 알 수 없는 로컬 루트에, 마치 우리를 오랜 벗을 대하듯 정성껏 반겨준 후하디후한 하와이 인심, 네이버 블로그에는 나와 있지 않은 로컬 맛집들, 자연과 친해지는 방법, 하와이에서 살아온 일생 이야기까지. 우리는 그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최고로 값진 선물을 받았다. 선뜻 우리에게 소중한 하루를 내어주신 아저씨 덕분에 우리의 하와이 여행은 아주 오래도록 따스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언젠가 나도 발 딛고 살아가는 내 터전을 이리 다정히 설명할 수 있는 나이테 굵은 사람으로 클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이런 여유를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크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