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휑뎅그렁하다

먹지 않는 약을 전부 버렸다.

by 편린
『 표현 수집가의 말맛 노트 』는 우리가 값진 표현들을 얻어 더욱 풍성하게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작하는 연재 노트입니다. 매주 월요일, 신선하고 다채로운 표현들을 하나씩 새겨보세요-!
1) 속이 비고 넓기만 하여 매우 허전하다.
2) 넓은 곳에 물건이 아주 조금밖에 없어 잘 어울리지 아니하고 빈 것 같다.


그런 날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와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다고 위안 삼고 있었던 것들이 확연히 드러나서 전부 뒤엎어버리고 싶은 날.


지난날 한참이나 바깥의 것들에만 골몰하느라 집을 저만치 버려둔 지 오래였다. 거의 잠만 자는 용도로만 활용하던 공간이었달까. 쌓여만 가는 물건들에 소심하게 등을 돌린 채 앞만 보고 달리느라 이제는 내 방구석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조차 걷잡을 수 없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약들은 라탄 바구니 안에서 잔뜩 쌓이다 못해 이리저리 터져 나와 넘쳐흐르고 있었고. 빼곡히도 다채로운 알약과 물약 뭉치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걸 어느 세월에 다 정리할까 싶어 착잡하기도 했지만, 악착같이 살아내느라 그동안 정말 여기저기 많이도 아팠구나 싶었다. 왠지 이것들을 그러모으면 자그마한 보건실 하나 정도는 운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삐져나온 약통이 마치 내 모습 같았다. 최근 들어 많은 관계와 생각들을 정리하고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는데, 그런 상황들을 전혀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폭주 기관차마냥 전력 질주 중이었다. 나를 또 잔뜩 축내면서. 홀로 바쁜 틈에 서늘한 가을의 기운까지 겹쳐서 요 며칠 휑뎅그렁한 마음이 일었다. 서울 한복판에 갑자기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달까. 그래서 잠시 모든 걸 멈춰두고 나를 돌보는 대청소를 하고 싶어졌다.


Decluttering이라고 했던가. 미국 사람들은 종종 집 안 구석구석 잠들어있던 잡동사니들을 전부 기부하고 버린 뒤 짐의 규모를 줄이는 리추얼을 한다고 한다. 쓰지 않는 물건들을 보부상처럼 잔뜩 껴안고 살아가던 사람이 주기적으로 그것들을 비워내게 되면, 심리적으로 엄청난 안정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실생활에 무용한 것들을 미래를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잔뜩 쟁여놓고 살아가다 보면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우연히 발견한 뚱뚱한 약통을 시작으로 그렇게 나도 집 뒤엎기 의식을 다소 소란하고 급작스럽게 시작했다.


75L짜리 종량제 봉투 10장을 구매하고, (요즘은 100L 봉투가 사라져서 아쉽다.) 요리조리 줄자로 재 집 구조를 파악한 후 집 크기에 맞는 수납함과 수납장들을 잔뜩 구매해 조립했다. 퇴사할 때 회사에서 가져온 물건들, 언젠가 쓸 것 같아 모아둔 페이퍼들, 당근을 하려고 모아두었던 옷가지들, 새로운 요리를 할 때 쓰일 거라 믿고 귀퉁이에 저장해둔 식재료들, 새 침대를 들인 후 처치할 바를 몰라 박스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던 이전 침구류까지. 모두 시원하게 나눔 하고, 당근 하고, 기부하고, 버렸다. 집 안에 잠들어있던 물건들 중 최근 1년 내에 쓰지 않았던 물건을 전부 미련 없이 비워낸 것. 차오르는 쓰레기의 주범인 빈 페트병을 더 이상 만들지 않기 위해 집 안에 정수기를 들였고, 물건들을 그때그때 제자리에 둘 수 있도록 수납공간을 깔끔히 정리했다. 구석구석 잠들어있던 묵은 때들까지 하나하나 닦아낶다. 특히나 약통에 있던 먹지 않는 약들을 고스란히 비워내며, 이제 더는 아프지 않고, 강건히 살아가자는 결심을 다졌다. 그렇게 일주일간 진행한 거한 의식 끝에 마침내 몇몇 가구들만이 휑뎅그렁히 놓인 집을 바라보고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꽈악 차오르는 것 같았다.


의미 없는 짐들을 한가득 떠안고 살아가는 것은 내일 당장 죽어도 미련이 없는 삶을 살겠다는 내 목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당장 내 삶에 필요 없는 것들을 비워내며 한결 가볍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현재를 즐기는 법. 오늘처럼 과거의 것들에서 시원하게 탈피하여, 언제나 유영하듯 살아가고 싶다. 외부의 것들에만 골몰하느라 내부의 것들을 멀리하지 않는 삶. 언제 아플까 두려워 잔뜩 약을 쟁여두기보다는 어떤 어려움이든 때마다 정면으로 돌파하는 삶. 한마디로 한쪽으로 균형이 쏠리지 않는 인생을 만들고 싶다.


안이 정돈되니 바깥도 괜스레 더 선명해 보입니다. 대청소를 마친 날, 집에서 바라본 노을입니다. :)


연재 브런치 북 『 표현 수집가의 말맛 노트』에 등장하는 단어의 정의들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네이버 국어사전, 그 외 기타 문학 속 표현들을 참고하여 쓰고 있습니다.


https://brunch.co.kr/@pyeonrin/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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