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이야기
“엄마 아빠! 일요일에 문배마을 가서 감자전 먹자! 제바알~”
낡아 떨어진 청록색 천 캐리어에 동생을 태우고 구곡폭포 뒷산을 오르는 엄마와 아빠는 철인이었을까. 한 손으로는 천방지축 7살 아이의 손을 끌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한창 아가인 동생을 들쳐 안은 채 부모님은 그 험준한 산길을 수도 없이 올랐다. 나는 그저 산맥의 정상 언저리를 지나면 닿는 문배마을에서 쫀득한 감자전을 맛볼 생각에 신이 났었고. 산의 중턱쯤 내가 지친 숨을 헐떡이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아빠는 열 걸음만 더 올라가면 도착이라며 나를 연신 다독였다. 나는 그렇게 한참이나 아빠의 그 열 걸음에 속아 주말마다 폴짝거리며 산에 올랐다. 서로의 등을 밀어주고 손을 당긴 끝에 다다른 정상에는 거나하게 취한 토마토 고주망태 아저씨들과 나만큼이나 짧은 다리로 산을 올라온 개구쟁이 동년배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했다며 건네는 정겨운 인사와 함께. 짭조름한 감자전과 달큰한 막걸리 내음, 따스한 말씨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도 가끔씩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산을 타는 어른이 되었다.
특히나 퇴사 후에는 전에 없던 평일 대낮의 여유를 한 움큼씩 즐기게 된 덕에 비교적 한산한 산등성이를 오르는 일이 잦았다. 북한산, 한라산, 삼악산... 스몰 토크에 능한 나는 종종 오르는 능선에서 등산 모임 어르신들과 금세 친구가 되곤 한다. 능청스런 내 말씨에 어르신들이 흥미를 보이기 시작하면, 어느덧 나는 그 무리에 합류해 손쉽게 길을 찾는다. 채비도 없이 즉흥적으로 산을 찾는 일이 잦지만, 그분들 덕에 늘 초행길도 무리 없이 오른다. 어느덧 산 타기의 달인이 되어버린 선배님들의 산행 속성 과외는 덤이다. 이를테면 장비는 어떤 게 진또베기인지, 가방에는 뭘 챙겨 와야 좋은지, 미끄러운 바윗길에서 어찌 발을 디뎌야 하는지... 빽빽한 도시 숲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정함이 스민다. 왠지 어릴 적 동네 산에서 만나던 푸근한 사람들을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유치원생이 산에 오를 때마다 철없이 들뜨던 마음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쩐지 많이 닮아있는 감정이 밀려온다. 잠시나마 그 무렵처럼 신나버리는.
어릴 적에는 그저 감자전이 먹고 싶어 산에 올랐지만, 지금은 그 시절의 동심을 잃고 싶지 않아 산에 오른다. 그리고 여전히 그때의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처럼 내 동심을 지켜줄 좋은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길고 긴 세월의 강을 건너며 많은 것들이 바뀌어왔지만, 나는 아직도 맨 처음의 감상으로 살아가려 애쓴다. 그리 노력하는 시간이 나를 꾸준히 재기 발랄하게 살아가도록 하니까. 그리고 그리 지켜온 발랄함이 주변 사람들에게도 살짝씩 스며들면 좋겠다. 그렇게 일평생 초심을 간직한 채 다정히 살아가다가 언젠가 나도 멋지게 산을 타는 근육 짱짱 할머니가 되어 뒤따라 오르는 후배들에게 한껏 살가운 말씨를 전하고 싶다.
“거기 청년! 열 걸음만 더 가면 정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