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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 일지] 지독한 책벌레들이 끌리는 이유

여덟 번째 이야기

by 편린

찬 기운이 옷깃의 틈으로 선선히 스미는 가을이 찾아든 얼마 전부터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만 왔던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평일 저녁 각자의 분주한 일과를 마치고, 강남역 부근의 자그마한 쪽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2주간 꼼꼼히 읽어냈던 시와 소설에 대한 소회를 나누는 시간이다. 언젠가 이도우 작가님의 소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읽으며, 마을 사람들과 시골 책방에 정겹게 둘러앉아 난로에 노릇하게 구운 귤을 하나씩 까먹으며 독서 감상을 나누는 일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 시절의 낭만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굳이’에서 오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온종일의 노고 끝에 휴식을 취하거나 더 생산적인 인생을 위해 무언가 추가로 성취하는 저녁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굳이 시간을 내어 생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무언가를 사부작사부작 벌이는 것. 그런 것들이야말로 느린 호흡과는 한참이나 멀어져 버린 당장의 세상에서 한 줌의 낭만을 채우는 일 같았다. ‘무용의 쓸모’라고나 할까.


특히나 함께 둘러앉아 따로 읽었던 시를 함께 소화시키는 일이 참 좋았다. 시라는 매력은 경험의 모양과 마음의 결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라, 우리는 시를 통해 같은 자리에서 저마다의 다채로운 상태를 살필 수 있었다. 안희연 시인의 ‘당근밭 걷기’를 읽고, 누군가는 자연과 교감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타인을 향한 사랑을, 누군가는 성장하는 스스로에 대한 예찬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렇게 같은 활자를 놓고 사뭇 다른 감상들을 꺼내놓는 사람들의 표정과 어투를 관찰하는 일은 나를 조금씩 넓혔다. 우리는 앉은자리에서 갖가지 사유의 뿌리를 얽고, 가지를 치며 작은 숲 하나를 만들었으니. 그렇게 만들어낸 숲의 품이 일상의 틈에도 종종 파고들어 나를 더 안정케 했다. 무언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나만의 단단한 비밀 벙커가 등 뒤에서 든든히 버티고 있는 기분이 들었달까. 함께 나눈 생각들을 독서 노트에 빼곡히 적다 보면, 나는 점점 더 유연한 사람이 되어서 나를 닳게 할 만한 것들 앞으로도 한층 더 여유롭고 대범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책을 읽고 깊게 사유하는 사람들에게 끌린다. 누군가가 정성스레 적어 내린 몇백 장에 걸친 페이지를 긴 시간을 내어 조용히 들어줄 수 있는 사람 같아서. 타인의 말을 인내하는 것이 힘들어진 세상에서 여전히 묵묵한 자세를 고수하고 있는 사람 같아서. 그중에서도 특히 생활에 당장 도움이 되지는 않아도 온기 섞인 말들을 쌓고 쌓다 보면 언젠가 더 스스로를 큰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믿음을 안고 독서 작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이 간다. 그래서일까. 거친 일상에서와는 달리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생채기가 나지 않도록 동글한 말들을 섬세히 골라 늘어놓는 이 사람들과 보내는 저녁이 유독 달았다. 볕이 길게 눕기 시작한 계절이 다가왔음에도 그다지 외롭지 않았다. 다정히 책을 안았던 그 습관들이 우리의 대화 속에도 옅게 스미고 번져서 여느 때보다 따스한 가을을 만들었으니.


책을 통해 서로의 온정을 나누는 일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글이라는 매개를 통해 느슨한 연대를 이루고, 서로의 말들에 마음을 데우며 우리가 달릴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타닥거리는 난롯가에서 구운 귤 냄새를 맡으며 우리들만의 점조직을 소곤소곤 이어갈 굿나잇 책방 같은 공간도 만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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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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