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쟁이 할머니

2026년 03월 03일의 단상들

by 편린
아이폰 메모장에 수천 장이 넘게 쌓여만 가는 상상들을 묵혀두기가 아쉬워졌습니다. 여름 북 페어에 들고나갈 에세이집 원고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요즘, 원고 글 외에 떠오르는 생각들까지도 하나둘씩 정리해두고 싶어졌어요. 생각이라는 게 스치듯 지나갈 때 기록해두지 않으면,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때 느꼈던 그 감정이 잘 떠오르지 않더군요. 긴 글을 작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려 소중한 공상들을 기록하는 것에 소홀해지지 않기 위해서 브런치에는 일기처럼 단상을 적어두고, 네이버 블로그에는 사진과 함께 매달의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생각들이 누군가에게도 좋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기를 바라며 종종 이곳에 올려두려 합니다. 봄 산책하듯 둘러보고 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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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지근한 봄비가 온종일 부슬부슬 내린 덕분에 서울의 공기가 제법 선명해졌다. 오늘 아침에는 빗물로 잘 닦여 맨들거리는 한강변 산책길 위로 한창 뜀박질을 하다가 인기쟁이 홍일점 할머니를 만났다. 강가를 달리다 보면 종종 운동기구가 한가득 펼쳐진 야외 체육관 같은 쉼터가 나오는데, 그곳의 한가운데에서 가장 돋보이는 위치를 선점한 채 할아버지들에게 둘러싸여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할머니였다. 문득 어릴 적 유치원 생일 파티 날, 남자아이들 틈에 둘러싸인 채 천진한 인기를 즐겼던 그날의 장면이 떠올랐다. 아기자기한 관심을 주고받는 일 앞에 나이 같은 것은 딱히 중요치 않고, 저분들은 여전히 해맑구나. 나도 언젠가 저렇게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호방한 몸짓으로 사근한 말들을 재잘재잘 전하는 인기쟁이 할머니가 되고 싶어졌다.


2. 지난 한 달간 매일 아침 러닝을 뛰자고 스스로 다짐했던 일이 월의 후반으로 가면서 스르르 뭉개져버렸다. 그런데 때마침 좋아하는 작가님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라온 80km가량의 한 달 러닝 기록을 보고, 3월의 첫 주 다시 심기일전하게 되었다. 일상 공유 차원에서 올리는 이런 소소한 것들이 때때로 지나가던 누군가에게 큰 영향력으로 다가가 지지부진하던 에너지를 다시 끌어올릴 절호의 기회로 이어지기도 한다. 작년에 성공했던 대대적인 체중 감량 역시 그랬다. 영영 미루고 미루던 회피성 과업일 뿐이었던 다이어트는 친한 언니의 독한 의지력 곁에서 재점화되었고, 결국 내게 차곡차곡 완성된 하나의 결과물이 되었다. 어떤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냐 하면, 나는 아무래도 언제까지나 그들처럼 좋은 영향을 나누는 사람이고 싶다.


3. 오전 7시에 운동을 나갔다가 8시쯤 되돌아오면, 로비에 든든히 자리를 지키고 계신 경비원 아저씨께서 자그마한 호롱불 같은 독서등을 켜놓고, 늘 무언가를 골똘히 읽고 계신다. 미간에 세로로 두터운 주름을 잡아둔 채, 총명한 눈빛을 책상 아래에 고정하고 그렇게. 그리고 그 오른편에는 아저씨의 풍채만큼이나 커다랗고 투박한 검정색 모니터도 하나 놓여 있다. 항상 궁금하다. 아침마다 무엇을 저리 열심히 보고 계신 걸까? 아니라면 혹시 무언가를 창조하고 계신 걸까. 로비를 지나며 종종 하는 이런 상상들은 늘 낙관적인 생각들로 번진다. 하루를 바지런히 깨우는 아저씨의 기운을 받아 나도 무언가 만들어내거나 배우는 하루를 살고 싶어진달까.


4. "선생님, 그런데 혹시... ADHD인도 공부를 잘할 수 있나요?"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교내 상담센터 선생님께 내가 던졌던 천진하고도 맹랑한 질문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때까지는 내가 ADHD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툭하면 어딘지 모를 곳에 소중한 물건을 깜빡 두고 오거나, 초등학생 시절 사용하던 알림장 같은 노트가 없다면 다음날 학교로 챙겨가야 할 문구를 잊어버리거나, 국어 문법을 공부하다 별안간 수학 문제집을 푸는 등의 산만한 행동들이 거슬렸다. '아이큐 테스트로 반에서 1등을 먹었던 내가 ADHD일 수가 있나.'라는 게 그 당시 나의 치기 어린 생각. 병원에 가서 정식으로 검사를 받아본 건 아니지만,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내가 ADHD인임을 확신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행동 특성이 딱히 일상생활에 크나큰 장애물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창의적인 생각들이 나를 예술적으로 살게 한달까. 작은 덜렁거림들은 행동 습관 교정으로 보완하면 그만이지만, 책상 위에 두텁게 쌓여가는 이 기발한 상상들이 사라지는 건 죽기보다 힘들다. 그 교정이란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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