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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작가 Jul 15. 2023

역사:임진왜란 도중 여진족과 한판 붙은 일본군

일본군은 왜 여진족 영토를 넘봤는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는 여진족이랑 전투를 벌였는데요

기록에 따르면 꽤 치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군 기록에 의하면

약 1500명 정도의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넘어간 가토는

국자로 (중국 지린성) 일대에

13개의 여진 부락을 약탈하고 불태웠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날밤 오란카이인 약 3천 명이

북을 치고 반궁을 발사하며 야습해오자

조총으로 격퇴하고 이른 아침이 되어도

끝까지 추격해 수도인 산상까지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진족의 끈질긴 공세가 이어지자

가토 군대도 다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가토가 여진족 공격을 계획하자

여진족에게 원한이 많았던 조선 백성도

상당수가 모집에 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기록이 아닌

여러가지 기록을 조합해보면

여진족은 일본군들이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렸고

때를 기다려 일본군을 포위한 여진족은

인해전술로 가토군을 압박했다고 합니다.

결국 당황한 가토군은

자신들이 들어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둘러서

급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일본군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 한 명이

여진족 20명 30명을 필척했다고 하지만

그랬다면 굳이 급히 도망칠 이유가 있었을까요?

여진족을 물리치면서 가토는 13개의 성을 함락했으나

여진족이 인해전술로 밀고오자 위험을 느낀 가토는

재빠르게 후퇴했으며

조선쪽 기록에서는 노토부락의 성을

공략하던 중 여진군이 사방에서 밀고들어와

공성을 포기하고 후퇴했다고 합니다.

전쟁 후 가토가 히데요시에게 보고하기를

오란카이에서 명으로 통하는 길을 찾았지만
오란카이는 조선의 2배 정도 넓고
타타르족(몽골지역)을 통과해야하는데
그것은 무리입니다.
오란카이는 밭 뿐으로 잡곡만 생산되고 군량미가 손에 들어 올
전망이 없으며, 오란카이는 일본의 다이묘와 같은
 넓은 지역을통치하는 통솔자가 없습니다.

그럼 가토가 여진족을 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명으로 향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과 여진족을 복속시킨 후 명나라를 공격하면

좀 더 수월하게 전쟁을 치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진족의 영토는 조선보다 2배 이상 넓으며

타타르족(몽골지역)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건 도저히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둘째는 식량이었습니다.

여진족에게서도 전쟁물자를 지원받을 생각이었지만

주변이 밭 뿐에다가 잡곡만 생산되고

전쟁에 필요한 군량미가 생산되지 않는 걸 보고서

가치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셋째는 조선과 여진족 사이에

잦은 분쟁이 있어서

만약 가토가 함경도를 자신의 영토로 받게 되면

여진족이 골칫거리가 될 것이 뻔하자

그걸 방지하기 위해 미리 전쟁했다는 겁니다


넷째는 가토 기요마사가

고니시 유키나와를 의식해서입니다.

고니시가 평양에서 진군을 잠시 멈추자

그 틈을 노려 만주와 연해주 지방까지 진출해

자신의 영지를 넓히고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한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명나라의 개입과 전국팔도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이순신 장군님이 이끄는 해군에

전쟁의 판도가 뒤바뀌고

여진족이 꽤 버거운 상대라고

느낀 가토는 포기하게 됩니다.


(여진족하고 전투 후 파랗게 겁에 질렸다고..)

가토 기요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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