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의 나라 네덜란드
브런치에서 '네딸랜드'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신경미 작가의 '시간을 파는 서점'이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6개국의 서점 이야기인데, 내가 좋아하는 단어인 시간, 서점, 네덜란드가 모두 들어있는 책이다. 왜 좋아하는지는 묻지 말기를. 좋아하는 데에 이유가 필요한가. 하지만 그럼에도 이 중에 한 가지 단어만, 좋아하는 이유를 냉큼 소개하자면, 네덜란드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괜스레 마음이 설레기 때문이다. 왜 설레느냐고 묻는다면, 또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네덜란드 유학을 꿈꾸기도 했었고(아직 포기한 것은 아니다.), 교양 과목으로 네덜란드어를 무려 1년이나 들었던 점, 그러나 쥐뿔도 네덜란드어를 모르지만 그냥 친근한 느낌이 들어 유튜브를 통해 네덜란드어 공부영상을 찾아본 다는 점 등이 있다.
내 몸에는 허세와 감성기생충이 살고 있어서, 서점은 무조건 커피와 어울린다는 무논리적인 결론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서점에 관한 책을 읽으니, 직접 내린 커피와 함께 머리 크기만한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완독할 때까지 이 철칙을 지켰다.
저자는 암스테르담의 'ABC서점'을 순례하며 이 서점의 내부 구조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재미있는 달팽이 구조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나선형으로 축적되는 지식 체계를 떠올리며 지식을 쌓는 행위의 마지막 도착점과 목적지가 어디여야 하는지 질문하게 된다."(p.84)
나선형 계단을 보고 지식의 축적과 지식을 쌓는 행위의 목적지를 떠올리는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에 기대어 한마디 거들자면, 단순히 지식의 목적이 자기 만족이나 축적에만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앎이라고 하는 것을 통하여 인간의 더 좋은 삶은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묻고, 대답을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단지 먹고 사는 삶이 아니라, '훌륭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훌륭한 삶'이란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공동체의 공적 업무에 참여하는 정치를 할 수 있고, 선과 악, 삶의 의미를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찾아진다"(이도영, 페어처치, 2017). 그러나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발전한 자본주의 문명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예전과는 달리 세련되게 탈바꿈한 동물의 삶과 인간의 삶을 교차하고 있기에,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삶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더 사유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는 대한민국은 어떠할까. 한동일 신부가 탁월한 관찰을 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일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착취당하며 사회구조적으로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는 무신경해요.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모른 척하기 일쑤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한동일, 라틴어수업, 2017).
거대한 구조 앞에 작디 작은 개인은 무력해보인다. 그러나 '훌륭한 삶'을 따라가는 지식으로 충전된, 개인들이 모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러한 개인들이 무심코 만나는, 서점을 둘러보는 발걸음은 따뜻한 가슴을 갖는 시작점이 아닐까.
저자는 따뜻한 가슴을 품은 서점을 책 중간에 소개한다. 네덜란드 즈볼러 도시에 있는 '반더스 인 더 브루어른' 서점이다. 원래 묘지였던 이 서점의 지하에는 고고학 발굴로 발견된 해골을 재현한 마네킹이 있다. 14세기에 살았던 '헤르맨'이라는 이름의 23세 청년이다. 발견된 청년의 머리에는 둔기로 부상을 입은 흔적이 있는데, 아마 꽃다운 나이에 어떠한 이유로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주목할 점은 '반더스 인 더 부르어른' 서점이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14세기의 청년을 기념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소중한 인격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를 사회적인 행동으로 실천하고 사회적 가치를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이 어려운 일을 해냈다. 비록 누구인지 모르는 풀꽃 같은 인생이지만 거기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헤르맨'이라는 청년을 기념하고 애도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애도하고 기념하는 것임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실현했다."(p.139)
이것은 작은 자를 향하여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수치'를 느꼈음을 보여준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게 된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무능함과 무고함이 깃들어 있는 연민과 동정은 최소치의 시혜를 베풀고 나서 빨리 그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 한다.
반면 수치를 느끼는 자는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역량이 자기 안에 있음을 알며, 그 역량을 미처 사용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수치를 느끼는 자는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낸 죄에 자기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 세상의 불의를 보고 자기도 거기에 연루되어 있기에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수치를 느낀 자만이 의분을 느낄 줄 알고, 수치를 느낀 자만이 죄와 싸운다"(이도영, 페어처치, 2017).
작은 자의 고통을 보고 내 자신도 거기에 연루되어 있다고 느끼는가? 요즘들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아직 "총체적인 죄악과 구조적인 죄악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동정과 연민으로 개개인을 시혜적 차원에서 도울 수 밖에 없다는 무능력(이도영, 페어처치, 2017)"이 내 안에 가득하다. 부디 서점이라는 플랫폼이, 따뜻한 마음을 지닌 책 한 권이 개인과 사회를 치료하는 작은 해독제로 작용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