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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엘북스 Feb 19. 2018

지체하지 말고 주체가 되기

"대리사회" -김민섭-

김민섭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읽으면서입니다. 309동 1201호라는 필명으로 대학원 박사과정과 시간강사를 거쳐온 저자의 과정 속에서, 또한 지성의 요람이라는 대학에서 발생한 부조리한 모습을 낱낱이 고하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책의 저자를 파고드는 습관이 있는데, 김민섭 작가가 「대리사회」라는 두 번째 책을 저술하였고, 이제는 필명 대신 본인의 이름으로 저작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sns에 친구를 신청하고 그가 올리는 글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나갔습니다. 그는 생각에서 멈추지않고 실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글 속에서 그가 끝없이 질문하고, 그 질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리사회」야 말로 저자의 실행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대리운전을 하며 그 안에서 느낀 것과 눈에 보여지는 사회의 모습을 그만의 필체로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대학에서 조교와 시간강사로 존재했던 8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리의 시간'이었다. 온전한 나로 존재하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을 위해 보낸 시간이었다. (p.21)


 역시 7년의 시간을 대학과 대학원에서 보냈기에 이 문장이 마음에 깊이 박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자에게 더 깊은 공감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낸 7년의 시간은 어떻게 해서든 책상 앞에서 책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이 시간이 모두 쓸모없었던 것은 아니었죠. 미약한 저의 지식이 조금이나마 성장할 수 있었던 귀한 배움의 시간이었어요. 그러나 배움의 시간에 안주하려던 저의 모습이 문제였습니다. 현실의 단단한 모습이 제 앞에 다가왔을 때, 배웠던대로 행하고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결단의 영역이었습니다.


지식과 삶의 괴리는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저에게 큰 고민거리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자신의 가르침과 다르게 사는 것을 보는 것도 고역이지만, 제 스스로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더 큰 역겨움이거든요. 올바름을 안은 채 그대로 한걸음 걸어가고 싶은 저에게 대리운전을 하며 자신의 주체성을 유지한 채 살아가는 저자는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대학은 역행해야 합니다".....하지만 정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기업을 흉내 내며 자본의 논리에 영합하기 이전에, 모든 구성원들을 노동자로서 대우해야 합니다.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에도 모든 노동자를 위한 매뉴얼이 있는데, 대학에는 그러한 것이 없습니다. 특히 가장 하부 구조에 놓인 이들에게 오히려 더욱 가혹합니다. 연구할수록 가난해지고, 강의할수록 힘겨워지는데, 대학은 '학문의 길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환상과 검열을 강요합니다. 사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그러한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만, 그것은 연구자들의 자존감에 맡겨두어야 합니다. 노동에 따른 보수를 지급할 사용자 측에서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닙니다. 특히 스스로 자본의 괴물이 되어버린 대학에게는 학문의 신성함을 무기 삼을 자격이 없습니다.(p. 25)



저는 교회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 대학이라는 단어를 교회라고 바꿔도 내용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에는 교회를 대표하는 담임목사가 존재하고 그와 함께 동역하는 동역자들이 있는데요(사실 동역자라는 말보다는 부하 직원이라는 말이 조금 더 어울리기도 합니다. 대체적으로 부교역자라고 불립니다). 이들이 '노동자로서 대우받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보통 계약서도 없이 일을 하게 되고, 부조리한 일이 있어도 법에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세계가 좁기 때문에 한번 소문이 잘못나면 다른 교회에서 함께하기 어렵습니다. 교회의 길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환상과 검열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라는 단어는 사람의 생각을 마비시키는 마취제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그러했으니 지금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사고를 잠식시켜나가면 또 다른 괴물이 만들어집니다. '은혜'로 일을 감당한다는 것(교회에서 대체로 이 말을 많이 씁니다.) 이야 말로 교회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라 그 일들을 감당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구조에 순응하지 않으려면 저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불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각자가 마주한 자리에서 불합리한 구조라는 거대한 괴물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사유함이 필요합니다. 온 몸으로 사유하고 온 몸으로 살아내는 그의 이야기가 놀랍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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