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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엘북스 Sep 14. 2019

욕심 좀 퍼내겠습니다.

"검사내전"-김웅-

그림 심리 검사를 하면서 여러 그림을 그렸다. 그 중 한 가지는 달걀화였다. 달걀하면 생각나는 것을 마음껏 그려보라고 했다. 어릴 적에 너무 맛있어서 끊임없이 먹고 싶었던 '계란과자'를 그렸다. 부활절날 교회에서 나눠주는 달걀 2개도 생각났다. 그리고 계란후라이도. 

담당 선생님께서 이 그림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황금색 달걀을 그리기도 하고, 달걀을 깨고 돈이 나오기도 하며, 황금알을 낳는 닭을 그린다고도 했다. 그런데 내 그림은...계란과자와 계란후라이와 삶은 달걀.

"물욕이 정말 1도 없으시네요"

잠깐 생각했다. '음... 이 시대에 물욕이 없는 것이 좋은건가?', '내가 정말 욕심이 없나?'  하지만 교회에서 일하는 직업인지라 "허허, 보셨죠? 제가 이렇게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하는 미소를 보였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는 삶의 행복과 성공을 돈으로 가늠한다. 하지만 듣기로는 어릴 적부터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배웠다. 조금 바꾸어서 과한 욕심은 부리지 말고 적당히 욕심 부리거나, 돈 욕심은 말고, 성취 욕심만 부리라고 듣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욕심을 부리는건 잘못됐으니 속으로 욕심은 있으나 겉으로 없는 척 하거나, 나는 욕심이 없다고 스스로 세뇌했다. 하지만 조용히 내 안을 들여다 보면, 가능한 남들만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은연중에 합리성을 초월한 커다란 무엇인가에 눈이 뒤집힌다. 


논리와 이성의 천적은 부조리가 아니라 욕심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주성분은 욕심, 욕망, 욕정이다. 우리는 '욕심'이라는 거친 바다 위를 구멍 뚫린 '합리'라는 배를 타고 가는 불안한 존재들이다. 마땅히 쉼 없이 구멍을 메우고 차오르는 욕심을 퍼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욕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허세를 부린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으로부터 논리와 이성을 지켜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p.63)


김웅 검사는 제발 대한민국에서 사기를 당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욕심을 돌아볼 것을 이야기한다. 논리와 이성을 부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욕심'이라는 것이다. 

어느 날 핸드폰을 바꾸고 싶었다. 항상 안드로이드만 사용했는데, 이번엔 아이폰을 써볼까 싶었다. 적응도 할겸 중고로 시작해봐야겠다 싶어서 중고거래 어플을 설치하고 매물을 검색하는데, 형성되어있는 시세에 절반도 안되는 아이폰이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오호, 사려고 마음먹으니 딱 도와주는구나" 주인에게 바로 연락했다. 그닥 멀지 않은 거리라 직거래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택배거래만 하겠다고 한다. 입금해주면 지금 바로 편의점 택배로 보낼 것이니 걱정 하지 말라고, 자신이 구매했다가 바로 지겨워서 판매하는 것이라고 했다. 

뭔가 냄새가 났지만, 저렴한 가격에 아이폰을 구매하여 사용하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오르니 점점 끌려들어갔다. '더치트'라는 사이트에서 사기 내역을 검색해보니, 사기 경력까지 조회가 되었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아니겠지 싶은 마음에 계속 답변을 했다. 

그냥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은 모조리 거짓말이다. 좋은 것을 굳이 광고까지 해서 당신에게 알려주는 선의란 없으며, 만약 그런 게 있다해도 절대 당신의 순번까지 돌아오지는 않는다. (p.97)

이 책을 조금만 더 일찍 읽었더라면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정말 뭐에 홀린듯 계속 미련이 남아 연락을 했었다. 다행히 모바일로 돈을 입금하려던 찰나에 정신이 번쩍들어 확인 버튼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상황을 판단했을 때 분명히 사기인게 확실했지만, 사기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고 저렴하게 사서 사용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조금만 조심하면 사기같은 거는 안 당하지'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어느덧 이성적 판단은 저 멀리 흩어졌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욕심의 출발점은 남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었다. 남이 정해놓은 기준에 미치는가, 미치지 않는가. 그 기준에 닿지 못하면 내면에서부터 채찍질을 하며 학대했다. 그러다보니 작은 것에 행복감을 느끼거나 감사하는 것은 사라져갔다. 누군가 그어놓은 선을 따라서 움직이며 "그래, 적어도 요즘 시대에 이런 것은 써줘야지", "이 나이 대에 이정도는 하면서 살아야 되는거 아니야?"하는 것이 가득했다. 

지금도 무던히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려 애쓰지 말고, 내가 매일 해나가는 것에 만족을 누리자고 노력하면서도 불현듯 욕심이 뚫린 마음의 구멍으로 가득 들어온다. 타인의 기준을 따라 무엇을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을 만족하게 해줘야 하는 것이니 내가 너무 힘들지만, 내가 사지 않고 참는 것은 나만 참으면 되는 것이니 훨씬 쉽다고 했다. 

비교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면 시선을 남에게서 돌려 '어제의 나'와 비교하자. '어제의 나'보다 오늘은 조금 더 나은 '내'가 되었는지 살피는 과정이 욕심이라는 괴물을 만났을 때, '안녕'이라 인사하며 지나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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