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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엘북스 Sep 13. 2019

최전선에 살어리랏다

"글쓰기의 최전선"-은유-

최전선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가? 최전선이라고 하면 전쟁, 군대 같은 말이 떠오르기 십상이다. 이 나라가 나에게 작은 엽서로 국방의 의무를 전하기에 군대를 다녀왔고, 우리나라는 아직 휴전 중이니 최전선은 아니더라도, 전선에 해당하는 곳에서 복무했다. 최전선이라고 하면 기억나는 것은 이게 전부다. 어? 그런데 은유 작가가 최전선의 정의를 새롭게 내렸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는 존재 물음 과정에 이른 곳이라면, 현실의 베일이 벗겨지는 곳이라면, 삶의 의미를 정의 내리게 되는 곳이라면, 거기가 바로 삶의 최전선이다.(p.78)


다시 스스로 물어본다. 최전선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가? 기간으로 대답하면, 작년 2018년부터 지금 현재까지 최전선에 살고 있다. 그리고 당분간 계속 그곳에 살 것 같다. 정확히 29년 11개월 동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하지 않고 살았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결혼을 했다. 한 번도 존재 물음을 갖지 않고, 지성의 요람이라고 하는 대학과 대학원을 지나왔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결혼을 한 것이다.


교회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짧은 기간 동안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들을 보고 실제로 그렇게 움직였다. 배움의 내용과 실천의 톱니바퀴가 어긋나는 것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나도 함께 어긋난 것에서 존재 물음 과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 수단으로 읽기와 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삶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태어나면서부터 내 삶과 붙어있는 교회에 대하여,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물었다. 그리고 잘 사는 것은 무엇인지, 결혼은 어떤 의미인지, 아내와 나는 어떤 관계인지, 부부를 닮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무엇인지.


읽어야만 하는 책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는 일은 사유의 폭을 넓혀주었고, 헝클어진 생각을 눈에 보이는 글자로 적는 것은 삶을 정돈시켜주었다.


이윤이 남지 않는 이 일을 손가락질 할 사람들이 많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고백한대로 살지 못하는 나를 보며, 뻔히 개인의 욕심을 공동체의 목표로 치환하는 모습을 보며 살아감에도 이 황홀한 낭비의 시간이 날 지탱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좋은 글쓰기(중략)... 그건 아마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혁명으로서 삶의 비상 브레이크"이거나 롤랑 바르트가 마지막 강의에서 말한 "각자에게서 너무 오랫동안 사라졌던 영혼을 다시 발견하기 위한 긴 작업"이자 조지 오웰이 언급한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다"에 부합하는 뺄셈의 존재론적 행위로서의 글쓰기일 것이다.(p.271)


인간이 인간이기를 몸부림치는 곳, 나의 최전선이, 우리의 최전선이 함께 모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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