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제대로 된 밥을 못 먹었다. 전기밥솥 때문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며 밥을 해야 할 밥솥이 조용히 시간만 보내고 밥을 하지 않았다. 취사 완료가 되어 뚜껑을 열어보면 설익은 밥알만 가득했다. 찜통에 밥을 넣고 다시 쪄야 그나마 먹을 수 있었다. 전기밥솥을 싸들고 차에 태워 A/S 센터로 갔다. 밥솥 상태를 확인한 기사님은 메인보드가 나가서 교체해야 한다고 했다. 교체 비용만 15만 원. 4년 된 밥솥이지만 밥솥 값의 절반이 넘는 금액을 내고 고쳐야 하나... 기사님은 이런 경우 수리보다 교체가 더 낫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래서 밥솥을 다시 들고 차에 태워 집에 데려왔다.
한참을 고민하다 새 밥솥으로 교체하고자 마음먹고 폭풍 검색을 했다. 밥솥을 만드는 회사는 크게 두 브랜드인데 종류와 가격이 제각각이었다. 동일 브랜드 같은 제품을 사자니 또 고장 날 것 같고 한 단계 낮은 걸 사자니 밥맛이 걱정이고 비싼 걸 사자니 밥맛이 거기서 거기 아닐까 싶고. 찜요리도 만능요리도 할 필요 없이 나는 밥만 잘 되는 밥솥이면 되는데... 며칠을 이것저것 고민하다 새로운 선택지를 발견했다. 바로 집에서 잠자고 있는 압력 밥솥! 심지어 결혼할 때 혼수로 사가지고 와서 개봉도 안 한 밥솥이 있었다. 16년 만에 상자 밖으로 압력 밥솥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명서를 정독하고 유튜브로 사용법을 익히느라 꽤 시간을 보냈다. 어릴 적 주방에서 압력밥솥이 터지는 걸 목격해서 그런지 나에게 압력밥솥은 마주하기 겁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16년 고이 모셔두고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압력밥솥으로 밥을 했다. 김이 빠지는 소리에 가슴이 콩닥콩닥... 터지는 건 아니겠지 괜찮겠지, 몇 걸음 떨어져 안절부절못했다. 뜸을 들이고 드디어 뚜껑을 여는 순간...
응? 괜찮은데?
어? 맛있는데?
전기밥솥 고장으로 압력밥솥이 세상밖으로 나오고 나는 매일 압력밥솥에 밥을 짓고 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이거 아니면 저거만 고민하지 말자! 요것도 있다. 더 나은 선택지는 언제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