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장 : 불신 2090.08.02

by 꿈꾸는나비

따뜻하고 은은한 차의 향기가 아직도 입가에 맴돌고 있는 것 같아 입맛을 다셨다. ‘가만, 잠깐, 잠깐만…그런데 내가 왜 누워 있지?’ 컴컴한 천장이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아 노인은 옆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누워 있던 곳은 간이침대였다. 뭔가 이상하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잠이 들었나? 꿈인가? 여기는 어디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왜? 기억의 조각들이 뿔뿔이 흩어져 주변을 돌고 있다. 어지럽게 기억들이 스치는 순간 퍼즐 하나를 손에 쥐었다. 맞아 우린 잠수함에 탔었지? 그러고 나서 차를 마시고 그러고… 그러고…. 기억이 없다. 차를 마시고 사람들과 웃고 얘기를 했는데 그러고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노인은 혼란스럽다. 혼란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고 두려움을 갖게 했다. 어둠 속에 눈이 적응하자 하나 둘 보이는 것이 나타났다. 침대… 임신부가 옆으로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또 다른 침대가 놓여 있다. 임신부 너머로 모두가 침대에 누워있다. 침대의 머리가 벽 쪽으로 붙은 채 그렇게 9개의 침대가 놓여 있다. 침대 다른 쪽 편에는 커다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문이 두 개가 있다. 하나의 문은 단단한 철로 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반이 창으로 되어 있는 이상한 문. 그 문 창으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순간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노인은 침대에서 일어나다 다시 주저앉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노인은 무거운 몸을 맨발로 질질 끌며 불빛이 새어 나오는 문으로 걸어갔다. 창 너머로 뭔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자 창을 통해 그 안이 들여다 보였다. 선장과 선원들이었다. 선원들은 모두 노인이 잠들었던 간이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고 선장만이 희미한 전등 빛에 의지한 채 탁자에 앉아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창을 두 번 두드렸다. 선장은 고개를 돌려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선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왔다. 노인은 선장을 창 너머로 노려봤다. 선장이 문 옆의 수화기를 잡아내어 귀에 가져대고는 노인에게 손가락으로 문 옆의 수화기를 가리켰다. 노인은 문 옆에 달린 수화기를 천천히 집어 들고 귀에 가져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직 일어나기엔 이른 시간입니다.”

“아 그런가요? 노인들은 원래 잠이 좀 없죠. 그나저나 우리는 왜 여기 이렇게 누워있는 건지 설명을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

“그럼요, 설명을 해드려야죠.”

그러고는 선장은 말이 없다. 노인은 두려움과 한기가 사라지고 피가 끓어오르는 심장이 느껴졌다. 매서운 눈으로 선장을 쏘아봤다.

“차에 약을 탔지? 우리를 재워야 할 이유가 있던 거야? 대체 여기는 어디야!”

“많이 당황스러우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차에 약을 탔습니다. 일종의 수면제 같은 겁니다. 건강에 전혀 이상은 없을 거고요.”

선장은 노인 너머 임신부와 아이들을 힐끗 보고 말을 이었다.

“그건 믿으셔도 됩니다. 태아도 아이들도 괜찮을 겁니다. 여러분을 수면 상태로 이곳에 오게 한 이유는 그게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해서입니다. 이방에서 앞으로 열흘 정도 머무르게 될 겁니다. 그 이후 이방을 나가게 되면 새로운 정착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믿으라고? 우리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자네들이 혹시 약탈자들인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한테 어떻게… 이렇게…”

노인은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서있기 힘들었다. 그래도 끝까지 수화기를 놓지 않았다.

“몇 시간 후면 모두 깨어날 겁니다. 그때까지 좀 쉬고 계시죠. 모두가 깨고 나면 이곳 책임자가 여러분께 설명할 겁니다. 그때까지 궁금한 게 있더라도 기다려 주십시오. 저는 더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럴 권한도 없고요. 여러분들을 모두 안전하게 이곳으로 데려온 걸로 제 할 일은 끝났으니까요.”

선장은 그렇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뒤돌아서 탁자로 돌아가 버렸다. 노인은 휘청거리는 다리로 겨우 버티며 수화기를 다시 벽에 걸어뒀다. 그 순간 노인은 자신의 손목 안쪽에 새겨진 글자를 봤다. ‘K20900801209’ 다른 손목에도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눈을 몇 차례 깜빡이며 다시 봤지만 손목의 글자는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리고 팔뚝에 붙어있는 작은 밴드가 보였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밴드를 잡아 뜯었다. 바늘 자국 하나가 보였다. 현기증이 느껴졌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노인은 문에 등을 대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에 아직 잠들어 있는 8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침대 밖으로 손이 삐져나온 여자 아이의 손목에 어렴풋이 번호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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