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24장 : 광장 2090.08.14

by 꿈꾸는나비

해저 기지로 온 지 2주가 되었다. 드디어 격리를 끝내고 나갈 수 있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모두들 들떠 있었다. 답답한 격리실을 벗어날 수 있다. 기지에 온 첫 주에는 기지의 생활을 적응하기 위한 교육이 이루어졌고 틈틈이 각자의 할 일을 결정하는 상담이 이루어졌다. 두 번째 주에는 각자 담당하게 될 일과 간단한 건강 검진과 피검사가 한번 더 이루어졌다. 그리고 앞으로 살게 된 방도 배정받았는데 두 가정이 방 한 개씩을, 노인과 임신부가 한방을 쓰게 되었다. 방은 침대와 작은 테이블 하나에 의자 2개가 다였지만 그렇게 비좁지도 않아 보였다. 모두가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일터로 갔고 노인과 임신부만 남았다. 임신부는 출산이 임박했다는 의사의 의견에 따라 진료실로 갔다. 노인은 자신을 찾아온 선장과 마주했다.

“광장에 같이 가보시겠어요? 광장은 함께 쓰는 공간입니다. 광장에서는 밖을 볼 수도 있죠.”

“밖을 보면 뭐가 보이기나 하나요? 빛 하나 들지 않는 곳일 텐데요.”

“한번 가보시죠.”

선장은 미소를 지으며 노인을 광장으로 안내했다. 격리된 방에서 빠져나와 긴 복도를 지나자 중앙 돔으로 향하는 복도 끝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광장으로 들어서자 환하기도 하고 아늑하기도 한 분위기가 노인을 압도했다. 한쪽 편에 정원처럼 꾸며진 공간에 나무들이 푸르름을 뽐내고 그 옆으로 꽃들이 심겨 있었다. 노인은 놀란 눈으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둥근 광장의 가장자리에는 탁자와 의자들, 곳곳에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채워져 있었다. 벽에는 비행기 창문과 같은 동그란 원형의 투명창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달려있었다. 넓지만 아늑한 광장에는 몇몇의 아이들이 나뭇잎을 닦아내고 그 주변 탁자와 의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노인은 의자를 정리하던 작은 여자 아이에게 다가갔다.

“참 귀여운 아이구나. 너는 이름이 뭐니?”

아이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가 수줍게 손을 내밀어 손목을 보여줬다. 가느다랗고 하얀 손목에 노인과 같이 번호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니, 번호 말고 이름”

아이는 빤히 노인을 쳐다본다. 그런 아이를 노인도 쳐다본다.

“착하고 사랑스럽게 생겼구나, 그럼 너 이름을 선애하고 해야겠다.”

노인은 아이를 바라보고 웃었다. 아이는 굳은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다가 같이 씩 웃는다.

‘나에게도 너처럼 착하고 사랑스러운 딸이 있지. 널 보니 딸아이가 더 보고 싶구나.’ 노인은 생각에 잠겼다. 아이는 마주 보고 웃다가 다른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선장이 다가와 투명창 앞 탁자로 노인을 안내했다.

“이곳에서는 아이들도 일을 하죠. 공동체 생활을 어릴 때부터 익혀야 하니까요. 아마 같이 온 아이들도 지금 간단한 일을 하고 있을 겁니다. 상추에 물을 주거나 달팽이 사육장을 치우고 있겠죠. 점심 식사 후에는 공부하러 갈 테고요.”

노인이 자리에 앉자 선장은 창 옆에 달린 스위치를 켰다. 창 밖을 향해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와 심해를 비췄다. 창 밖으로 5미터 정도까지 환하게 비쳤다. 노인의 눈에 심해가 들어왔다. 이곳이 바닷속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움직이는 괴상한 생물들 사이로 누워있는 물고기가 몇 마리 보였다.

“저 물고기들은 왜 저렇게 누워 있는 건가요? 죽은 건가요?”

“아니요, 죽은 게 아니고 자는 겁니다.”

“누워서 자는 물고기는 또 처음 보네요.”

“잠을 자고 있긴 한데 죽었다고도 볼 수 있죠. 심장이 멈췄거든요. 심해 물고기가 살아남는 방법입니다. 먹고 소화되기 시작하면 몇 시간 후 잠들죠. 먹이 활동이 쉽지 않은 심해이니 생체 활동이 중지되고 잠이 드는 겁니다. 그러다 며칠 후 다시 깨어나고요.”

“흠… 마치 우리가 그랬던 것 같이요?”

“아, 네…… 드셨던 차 안에 저 녀석들의 소화액이 들어 있죠.”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뻔했네요. 송장 개구리가 이곳 심해에도 있었나 보네요”

노인은 미간을 찌 뿌렸다.

“나를 이곳 기지에 데려온 이유가 뭔가요? 위원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나한테 여기서 뭘 할 거냐고 묻던데요?”

“글쎄요. 그냥 이곳에 같이 계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참 자연스럽게 나오네요? 내가 여기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다 늙어서 언제 송장이 될지 모를 사람한테 여기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요?”

“저는 이 기지가 세워질 때부터 이곳을 위해 일했습니다. 약탈자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여 가진걸 모두 빼앗아가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죠. 끔찍한 일입니다. 이곳은 저 심해 잠수함 없이는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에요. 지구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했던 말 기억하시죠?”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이곳 사람들은 이곳이 심해라는 것보다 우리가 인류의 마지막이라는 사실에 더 큰 압박을 느끼고 있죠. 그리고 이곳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으로 매 순간 최선을 대해 왔습니다. 큰 다툼이나 고성이 오간 적도 없고 늘 감정을 절제하고 인내하고 통제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심해라는 공포와 맞서고 어둠에 익숙해지고, 먹을거리를 길러내고 새로운 먹거리를 연구하고, 그날의 사용한 에너지와 남은 에너지를 계산하고, 해수를 담수로 바꾸고, 수시로 사람들의 건강을 체크하면서 그렇게 생존을 위해 살아가고 있죠. 그런데 우리는 점점 지쳐가고 있어요. 그리고... 인간미가 없다고 해야 할까요. 이 기지에 흐르는 긴장과 냉기가 느껴지셨죠? 아무도 웃고 떠들지 않아요. 다들 빨리 기지를 정착시키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죠. 일분일초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됐으니까요. 특히 위원장은 이곳의 질서를 위해 엄격한 통제를 강요해 왔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좀 여유를 가져야 할 때라고 봅니다. 그래서요. 이곳에 활기를 불어넣고 여유를 가져다 줄 사람이 필요했고 저는 그래서 이곳으로 모시고 온 겁니다. 가방을 제가 들여다본 적이 있죠?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낡은 책 몇 권과 그 안에 있던 압화들을 봤습니다. 압화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어릴 때 봤던 꽃들과 꽃향기가 떠올랐죠. 이름 모를 꽃들인데도 왠지 울컥하더라고요. 물론 가방 안에 있던 하모니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에게 우리가 기억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음악을 들려주세요. 특히 아이들에게요.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지금까지 삼십여 명 됩니다. 단 한 번도 이 기지 밖을 나가본 적이 없어요. 방금 전에 말을 걸었던 아이도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죠. 아이들에게는 이 기지가 세상의 전부입니다. 아이들은 모니터를 통해 물 밖 세상을 배웠고 그게 다였죠. 한 번도 땅을 밟아 본 적 없으니 그게 어떤 느낌인지도 모를 겁니다. 저는 이 아이들이 사진과 영상을 통해 배우지 못한 세상을 알고 기억해줬으면 해요. 그러니... 꽃에서 어떤 향기가 났었는지 설명해주세요. 푸르른 들판을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도록, 우거진 숲에 서면 어떤 느낌인지… 부탁드릴게요. 우리 중에 가장 많은 시간 땅에서 사신 분이잖아요.”

노인은 선장을 바라봤다. 선장 너머 꾸며져 있던 화단의 꽃들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잘 만들어진 조화였다. 노인은 천천히 선장의 거친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할 일 없는 나한테 딱 어울리는 일이군. 그런 거라면 내가 할 수 있지. 내가 여기서 애들한테 옛날 얘기나 해주고 하모니카 좀 불어주면 위원장이 아주… 난리가 나겠어. 하하하. 좋아 좋아. 내 역할은 그걸로 괜찮겠군. 맘에 드는 역할이야.”

선장은 그런 노인을 바라보며 웃었다. 선장은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잠시 뒤 노인이 말문을 열었다.

“혹시 달 기지에 생존자가 있을 것 같나요?”

“네?”

“달 기지가 파괴되었다고 해도… 그래도… 혹시 생존자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글쎄요. 뭍에서는 교신이 돼도 이곳 심해에서는 불가능하죠. 그쪽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다면 아마 확인할 수 있겠지만 그 신호를 받을 만한 곳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네요.”

“잠수함은요? 잠수함은 물 밖으로 나가면 신호를 확인할 수 있나요?”

“네, 어쩌면요. 시도는 해볼 수 있죠. 왜… 그러시는데요?”

노인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딸이 거기 있거든요. 내 딸이…”

노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선장도 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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