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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나비 Sep 04. 2023

14. 너의 눈이 빛나던 순간

아이들과 함께한 사춘기의 시간을 글로 남깁니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나에게 제일 많이 하는 말은 "아, 심심해. 엄마, 나 뭐 할까요?"이다. 하교 후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는 우리 집 집돌이 아들은 늘 심심해한다. 이 심심함은 코로나이던 2학년 시작되어 고학년이 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나가서 놀고 오라고 해도 같이 놀 친구가 없다고 한다. 학교가 끝나면 모두 학원 가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친구랑 놀기 위해 학원을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이도 하루종일 집에만 있는 건 아니다. 주 1회 축구, 주 2회 바둑, 주 3회 특공무술을 다니고 있다. 그래도 하루에 한 시간 남짓 학원을 다녀오는 것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집에서 보낸다. 그리고 ' 아, 심심해. 뭐 하지?'를 입에 달고 산다. 한때는 나랑 배드민턴도 치고 농구도 했었지만 내 관절염과 오십견으로 이마저도 힘들어졌고 체스나 보드게임도 이제는 시시해졌다. 소파에 기대 심심함을 달래며 게임을 하거나 핸드폰을 하거나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면 아이의 무기력감이 더 깊고 더 오래 계속될까 봐 답답하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사춘기이다 보니 함부로 내가 이것저것을 시킬 수도 없다.

"심심하면 방청소를 해보는 건 어떨까?"

"그건 싫은데요."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나에게 동네에서 초등학생 농구대회가 열리니 참가신청을 해달라고 했다.

"농구대회? 나가려고?"

"네, 나가고 싶어요."

드디어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진짜 대회에 나가고 싶은 걸까?' 반신반의하며 대회 참가 신청을 했다. 동네에서 열리는 농구대회는 저학년은 스킬챌린지 형태로, 고학년은 3대 3 농구경기로 진행되었다. 아이는 농구대회를 신청하고 연습을 하러 다녔다. 드디어 농구 대회날, 대회장으로 간 아이가 긴장하는 게 보였다. 20명이 넘는 아이들이 신청을 했고 키나 덩치에서 우리 아이는 많이 불리해 보였다. 몸을 푸는 시간에 다른 아이들의 슈팅 실력이 엄청나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농구 명언을 기억하며 아이를 격려했다. 대회 주최 측에서는 간단한 테스트(슈팅, 레이업)를 통해 즉석에서 총 6개 팀을 구성해 주었다. 3개 팀이 한 조가 되어 토너먼트로 경기를 진행하고 각 조 1위 팀이 결승전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아들은 원래 알던 동네 친구 한 명과 처음 보는 4학년 여학생과 한 팀이 되었다.

"아니, 저렇게 팀을 짜주면 어떻게 해, 너무 한 거 아냐?"

팀구성에 불만을 품은 남편이 중얼거렸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봐도 아들팀은 최약체팀이었다. 남학생 3명인 팀이 유리해 보이는 건 당연했고 다른 팀은 여학생을 포함한 4명으로 구성했기 때문이었다. 여학생들은 드리블도 슈팅도 힘들어 보였고 룰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어쩌랴... 여학생이 골을 넣으면 3점, 남학생은 2점을 준다는데...


대회의 첫 경기는 1조 A팀 vs B팀, 아들의 경기였다. A팀인 아들의 경기가 시작되자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전반 4분, 1분 휴식, 후반 4분의 경기동안 A팀은 상대 선수에 가로막혀 슈팅도 못하고 공을 뺏기는 일이 계속되었지만 그래도 A팀은 극적으로 B팀을 7대 4로 이겼다. 여학생에게 패스해서 슛을 넣는 공략이 성공한 거다. 그때였을 거다. 아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걸 느낀 게. C팀과의 경기는 더 치열했다. 키가 큰 선수도 있고 4명으로 구성된 팀이라 교체선수도 있었다. 아들팀은 막판 몇 초를 남기고 여학생에게 마지막 패스를 했고 그 학생의 슛이 성공하며 2점 차로 지던 경기에 3점을 추가하며 역전승을 거뒀다. 우리는 목이 쉬고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응원을 했다. 결승을 앞두고 아이는 목이 타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자기 팀원들과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진지하게 자기들만의 전략을 만들고 있었다.


드디어 결승전. 상대팀은 거친 몸싸움과 파울로 2승을 하고 올라온 2조의 강팀이었다. 농구클럽을 다니는지 현란한 테크닉과 슈팅은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경기 시작과 함께 2점을 내주며 경기는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아들과 아들친구 녀석도 슈팅에 연이어 성공했지만 상대를 막지 못해 계속 점수를 내주었다. 여전히 경기는 2점 차로 지고 있던 순간, 아들은 여학생에게 패스하고 무조건 슈팅하라고 외쳤다. 그 골을 시작으로 전세는 기울었고 결국 18대 8이라는 점수로 대회 우승팀이 되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아들은 나와 가족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아들은 머리와 얼굴이 땀범벅이 되고 티셔츠가 다 젖은 채 숨을 헐떡이며 뛰어 왔지만 눈빛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무기력하게 소파에 기대 '아, 심심해'를 외치던 아들은 그곳에 없었다. 아이는 전혀 심심해 보이지 않았다.


1등 우승 상품은 이온음료 한팩과 분식집 2천 원 쿠폰이었다. 하지만 아이에게 그건 값진 우승의 결과였다. 집으로 오는 내내 아이는 한시도 쉬지 않고 관중석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경기의 생생함을 들려주었다. 우리가 불리했지만 전략이 잘 통했다, 자기 팀이 유일하게 여자선수에게 패스하고 슛을 성공시켰다, 자기는 사실 몇 점으로 이겼는지도 몰랐다 등 아이는 집에 와서 저녁식사가 끝날 때까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것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성취감'이었고, '뿌듯함'이었고, '심심하지 않음'이었다. 그때까지도 아이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이는 이온음료 한팩을 넣어주었던 쇼핑백을 방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 쇼핑백에 붙어 있는 종이에 '1등'이 인쇄되어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건 그날 아이가 느꼈던 감정이 그 가방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기력하고 무력감을 느끼는 아들이 될까 봐 염려한 엄마의 걱정도 그곳에 없었다. 그날 나는 '심심해병'을 가지고 있는 아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보았다. 잘하든 못하든 하고 싶어 하는 일에 조건 없는 열렬한 지지를 보내주는 것. 사춘기 아들에게 필요한 건 그런 나의 응원이었다.


소중한 경험으로 우리의 사춘기는 새로운 방향으로 한걸음 더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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