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현관에 벗어던진 신발들을 정리하는데 내 신발만 흰색이다. 아이들의 신발은 모두 검은색이었다. 오늘 아침에 아들 녀석은 검은색 티셔츠에 검은색 바지, 검은색 양말에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검은색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 등교하는 뒷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그림자 같았다. 싱그러운 초록이 가득한 이 여름에 우리 아들은 어둡기만 하다. 어릴 때는 사다준 옷을 군소리 없이 입었는데 작년부터 내가 옷이나 신발을 사다 주면 "검은색으로 사주세요."라고 했다. 디자인도 브랜드도 상관없이 항상 '검은색'을 원했다. 그래서 나는 아들 녀석이 사춘기가 왔다는 걸 느꼈다. 이미 누나의 '블랙병'을 겪었기 때문이었을까? 왜 검은색일까 궁금한데 대답은 언제나 '그냥요.'이다. 이유는 없다. 무조건 블랙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겨울에 중학생 큰아이는 두 개의 패딩으로 겨울을 지냈다. 검은색 롱패딩과 검은색 숏패딩이었다. 등굣길을 보면 검은색이 사춘기의 색이구나 할 만큼 아이들은 모두 검은색 패딩을 입고 있었다. 유행이라고 하기엔 너무 강한 단결력과 결속력이 느껴졌다. 심지어 검은색 바지와 티를 입다 보니 겨울 내내 칙칙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봄이 되니 패션이 좀 바뀌었는데 이번엔 검은색 후드집업이었다. 신기할 만큼 아이들의 선택은 언제나 블랙이었다.
블랙의 시기가 지나면 무채색의 시대가 온다. 큰 아이는 이제 검정, 흰색, 회색을 선호한다. 회색 후드집업이 교복인양 매일 입고 다닌다. 얼마 전 공원 농구장에서 한 무리의 중학생들을 봤다. 그 아이들의 옷차림은 모두 검정바지, 흰색 티셔츠, 회색 후드집업... 교복이 아닐까 의심되는, 누구 하나 예외 없는 무채색이었다. 한참 자신을 꾸미고 개성을 드러낼 것 같지만 대부분의 사춘기 아이들은 무채색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블랙'이 있다.
RGB색 코드로 보면 검정은 '000000' 이다. 빛이 없음을 표현한 숫자이다. 아마 아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이 검정에서부터 자신을 표현할 색을 찾아가나 보다. 드디어 자기에게 어울리는 색을 찾을 무렵 아이들의 사춘기도 끝나겠지. 자신만의 색을 찾아가는 모습을... 나는 오늘도 인내하며 지켜보고 있다. 이 날씨에 칙칙한 검은색을 입어도... 이 더운데 검은 점퍼를 걸치고 나가도... 침묵하며 지켜본다. '검은색이라 때타도 몰라서 좋네', '검은색이기만 하면 되니까 까다롭지 않아서 좋네', '네가 좋다니 나도 좋네' 라며.
언젠가 아이들이 자신만의 명도와 채도와 색상을 찾길 바라며...블랙의 시기를 함께 보낸다.